트럼프 기후정책 후퇴의 역설...기업 '물리적 위험' 커진다

기후위기 대응 전환위험 줄면 물리적 위험은 커져 국가 차원 물리적 위험 관리 데이터 플렛폼 구축 필요 기후 대응, 기업 생존과 경쟁력 차원으로 접근해야

2025-04-17     ESG경제
3월 25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마을에서 주민들이 야산에 번진 산불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5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파리기후변화협정(Paris Agreement) 탈퇴를 공식화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비록 협정 규정에 따라 미국의 공식 탈퇴는 유엔 통보 후 1년이 경과한 2026년 1월부터 효력이 발생하지만,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 중 하나인 미국의 정책 방향 전환은 국제사회의 기후 대응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전 지구적 탄소감축 흐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도,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를 피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고탄소 산업에 속한 일부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기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파리협정 탈퇴와 함께 화석연료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트럼프 2기 정부의 정책 방향은 이들 기업이 직면한 ‘전환위험(Transition Risk)’을 낮춰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전환위험이란 탄소 배출 저감을 위한 정책 도입—예컨대 탄소세, 친환경 기술 투자, 에너지 전환 등에 따라 기업이 부담하게 되는 재무적 위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환위험이 감소하면 자연스레 ‘물리적 위험(Physical Risk)’은 증가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2기의 기후정책은 일종의 '역설'을 초래한다. 물리적 위험이란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예: 폭염, 산불, 홍수, 가뭄, 태풍 등)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경제적 피해를 뜻한다. 즉, 고탄소 산업이 부담을 덜수록, 그 결과로 초래되는 물리적 피해는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구조다.

실제 사례는 그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발생한 경북 의성 산불은 총 피해액 약 1조 435억 원, 복구비용은 약 2조 6,533억 원으로 추산된다. 기후과학 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과 ‘클리마미터(Climameter)’는 산불 당시 영남 지역의 기온이 평년 대비 최대 10도까지 상승했다고 분석하며, 이 같은 이상 기후 현상에 기후변화의 영향이 직접적이었음을 지적했다. 온실가스를 배출한 주체는 제한된 산업에 불과하지만, 피해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처럼 전환위험과 물리적 위험은 명백한 상충관계(trade-off)를 이루고 있다. 기후 대응이 후퇴할수록 물리적 위험은 증폭되고, 그 피해는 산업을 막론하고 모든 경제주체와 시민들에게 전가된다.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 한국의 물리적 위험 키울 것

미국의 탈퇴로 파리협정의 구속력이 약화된다면, 지구 평균기온 상승 속도는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곧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물리적 위험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2년 포스코의 포항 제철소가 집중호우로 침수되면서 약 1조 3,4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 사례는 산업계가 기후변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전경영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물리적 위험으로 인해 국내 산업 전반의 매출은 최대 39.4% 감소하고, 비용은 최대 63.3% 증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기후 리스크는 더 이상 ‘자연재해’라는 운명적 재앙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경영의 변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에 발맞춰 한국지속가능성공시기준위원회(KSSB)는 2024년 IFRS S2 기준에 근거한 국내 ESG 공시기준을 발표하며 기업들에게 물리적 위험의 공시와 전략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기준이 의무화될 경우, 기업은 자산 위치, 공급망, 생산시설 등을 고려해 물리적 위험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이에 대응하는 시나리오와 경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부분의 기업은 고도화된 기후 데이터, 분석 역량,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소기업은 물론, 상당수 대기업조차 자체 역량만으로 물리적 위험을 정밀하게 평가하기 어려워 해외 컨설팅 기관이나 데이터 제공 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문

제는 이들 기관이 데이터 산정 방식이나 분석 로직을 명확히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기업은 높은 비용을 들여도 불확실성을 안고 외부 자원에 반복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부의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국가 차원에서 신뢰할 수 있는 물리적 위험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기업에게 무상 혹은 저비용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업이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교한 시나리오와 대응 전략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단순한 리스크 관리 수준을 넘어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확보의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트럼프의 기후정책 후퇴가 산업계에 숨통을 틔워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단기적 비용 절감을 장기적 피해 증가로 대체하는, 실로 위험한 착각이다. 특정 산업의 규제 회피는 곧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물리적 피해의 확대로 이어지며, 이는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기업 경영에도 중장기적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기후위기 시대, 물리적 위험은 ‘불확실성’이 아닌 ‘필연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물리적 위험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선제적 대응은 지속가능한 경영의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다. 이제 기후 리스크는 ESG 차원의 '준법' 이슈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서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핵심적인 ‘경쟁력’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정준희 대구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정준희 대구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