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법재판소, 파리협정 불이행 국제법 위반 판단...파장 어디까지?
ICJ, 국가 온실가스 배출로부터 환경 보호 의무...파리협정 준수 포함 의무 소홀시 법적 책임...기후변화 책임 큰 나라 상대로 소송가능성 열려 ICJ 관할권 인정않는 미국이나 중국 상대로 ICJ에 제소하는 건 불가능
[ESG경제신문=이신형기자]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3일 국가는 온실가스 배출로부터 환경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ICJ는 환경 보호 의무에는 기온 상승을 1.5도로 억제한다는 파리기후협정 이행도 포함된다고 적시했다. 또한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나 석유와 가스 사업의 신규 허가도 국가의 환경 보호 의무 위반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ICJ는 국가가 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법적 책임을 지게 되고 해당 국가는 불법 행위 중단과 재발 방지를 보장하고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유엔뉴스와 AP통신, BBC의 보도에 따르면 ICJ는 태평양 도서국 바누아투의 요구로 열린 심리에서 이같은 권고적 의견을 제시했다. ‘세계 법원’으로 불리는 ICJ는 유엔 회원국 간 법적 분쟁을 해결하고 유엔이 제기하는 법적인 이슈에 대해 권고적 의견을 제시한다. ICJ가 국가의 기후변화 의무와 법적 책임에 관한 권고적 의견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앞서 해수면 상승의 최대 피해국인 태평양 도서국의 청년들이 선진국에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고 나섰고 이들의 행동에 감화를 받은 바누아투 정부는 지난 2021년 9월 기후변화에 관한 ICJ의 판단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유엔은 ▲국제법에 따라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 ▲이런 의무를 지닌 국가가 환경에 피해를 줄 경우 직면할 법적 결과에 대한 ICJ의 자문을 받기로 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ICJ는 이날 15명의 재판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심의에서 만장일치로 기후변화 대응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제법 위반이라는 권고적 의견을 냈다.
ICJ는 유엔 회원국들은 환경 조약과 인권 조약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회원국들이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한 오존층 조약과 생물다양성 협약, 교토 의정서, 파리기후협정 등 다양한 환경 조약의 당사국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은 인간의 권리를 향유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고 ‘세계인권선언’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조약에 참여한 회원국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함으로써 인류가 이런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ICJ는 밝혔다.
ICJ 판단의 파급 효과는?
AP통신은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이번 판단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고 기후변화 대응에 소홀한 나라를 대상으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법적 조치는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가 큰 나라가 온실가스 다배출국을 상대로 ICJ에 제소해 책임을 묻는 것과 활동가 등이 자국에서 자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 국제법을 준수해야 하는 투자 협정 등이 포함된다.
AP통신에 따르면 ICJ는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본 일부 국가나 개인이 보상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보상의 형태는 파괴된 환경의 복원이나 금전적 배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ICJ는 원상회복(restitution)은 “파괴되거나 손상된 기반 시설의 재건, 생태계 및 생물다양성 복원이 될 수 있다”며 이런 조치가 불가능할 경우, 금전적 배상이 평가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ICJ는 “정확한 피해 규모 산정에는 보통 불확실성이 따르기 때문에 계산이 어려울 수 있다”고 인정했다.
BBC에 따르면 네이처에 실린 논문은 2000년부터 2019년까지 기후변화에 따른 손실이 2조8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태평양 도서국인 마셜제도는 기후변화 적응에 90억달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법조계 인사와 활동가들은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은 기후 행동의 “역사적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제환경법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Environment)의 에릭 레논 선임 변호사는 ICJ의 이번 판단은 올해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적극적인 기후행동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며 “당사국들은 ICJ의 판단을 받아들여 COP30과 그 이후의 야심찬 성과를 달성하는데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BBC에 따르면 이번 판단이 이르면 다음 주부터 ICJ뿐 아니라 회원국 법원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BBC가 인터뷰한 변호사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이미 ICJ의 의견을 기반으로 부유하고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기후변화 유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 제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ICJ에 제소해 보상을 요구하려면 대상국이 영국처럼 ICJ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나라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미국이나 중국을 ICJ에 제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제환경법센터의 조이 차우드허리 변호사는 “ICJ의 의견을 인용해 자국 법원이든 타국 법원이든 전 세계 어느 법원에서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을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려면 미국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는 얘기다.
이런 경우 ICJ의 권고적 의견이 얼마나 존중받느냐가 관건이다. 로펌 도티 스트리트 챔버스(Doughty Street Chambers)의 하르즈 나룰라 기후 전문 변호사는 “국가가 자발적으로 ICJ의 권고적 의견을 준수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 외무부 대변인은 영국 이번 판단에 대한 영국 정부의 의견을 묻는 BBC의 질의에 "코멘트하기 전에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도 “기후변화 대응은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국과 세계가 긴급하게 대응할 문제로 남게 될 것”이라며 “유엔의 기존 기후 조약과 메커니즘 준수를 위한 국제적인 약속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우리의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BBC의 질의에 “언제나 그렇듯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 전체는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며 평범한 미국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