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열배터리’, 산업 탈탄소화 새 지평 여나
론도 에너지, 100MWh 열배터리 가동 태양광 충전·초고온 저장으로 효율 97% 달성 현실 산업 적용 가능성 입증, 고온 산업열 탈탄소 핵심
[ESG경제신문=이진원 기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산업용 열에너지 저장장치(TES)가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TES는 전력을 열로 변환해 저장한 뒤 필요할 때 다시 열로 공급하는 ‘열배터리(heat battery)’다.
제조업, 시멘트, 철강 등은 오랫동안 고온·고품질의 열이 필요한 탓에 탄소 배출을 줄이기 어려운 산업으로 꼽혀왔다. 전력 생산 분야에서는 배터리가 비교적 손쉽게 대체 기술로 활용될 수 있지만, 열의 전기화는 훨씬 복잡한 과제였다.
이런 가운데 최근 론도 에너지(Rondo Energy)가 세계 최대 규모의 열배터리 가동을 발표하며, 그동안 이론과 실험 단계에 머물던 TES 기술이 현실 산업에 적용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 스토리지 뉴스’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기술 제공업체 론도 에너지는 16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홀름스 웨스턴 오일 코퍼레이션(Holmes Western Oil Corporation)의 산업시설에서 100MWh급 론도 열배터리(Rondo Heat Battery, RHB) 시스템의 상업적 운영을 시작했다.
이는 최근 유럽 헝가리에서 가동을 시작한, 지금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던 교토그룹(Kyoto Group)의 56MWh급 TES를 넘어서는 기록이다.
■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1000°C 벽돌 배터리
RHB는 현장 내 설치된 태양광 발전(PV) 전력으로 직접 충전된다. 전력으로 전기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인 ‘줄 히터(Joule heater)’를 가열하고, 히터에서 방출된 복사열을 이용해 내화 벽돌을 최대 1500°C까지 달군 뒤 이 열을 수 시간에서 수일 동안 저장한다.
이어 공기를 벽돌 더미 사이로 통과시켜 1000°C 이상의 ‘초가열 공기(superheated air)’를 만들어 증기나 열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열 전달 속도는 공기 유량 조절로 조정되며, 론도의 독자적인 자동화 인공지능(AI) 제어 시스템을 통해 원하는 온도로 공급된다.
론도는 왕복 에너지 효율(RTE)이 97% 이상에 달한다고 밝혔다. RTE는 저장한 에너지를 다시 꺼내 쓸 때, 원래 넣었던 에너지 중 얼마를 실제로 되돌려 쓸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에너지 저장장치의 성능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다. RTE가 97%라는 건 전기를 열로 바꾸는 과정과 열을 벽돌에 저장하고 다시 꺼내는 과정에서 열 손실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회사 측은 가스를 태양광으로 대체함으로써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동시에 에너지 비용 변동성도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우리는 오늘의 세상을 탈탄소화한다”
존 오도넬(John O'Donnell) 론도 공동창업자이자 최고혁신책임자(CIO)는 “우리는 오늘 존재하는 세상을 탈탄소화하고 있다”면서 “석유·가스 기업이 천연가스를 태워 열을 얻는 대신 태양광 전력으로 같은 일을 한다면, 그것이 현실적 전환의 시작이다”라고 밝혔다.
오도넬은 캘리포니아의 높은 천연가스 가격, 저렴한 태양광, 주 정부의 친환경 정책이 결합되면서 이번 프로젝트가 상업적으로도 타당했다고 강조했다.
론도의 이번 100MWh급 시스템은 2023년 2MWh 규모의 실증 프로젝트 이후 처음 상업 운전에 돌입한 대형 열배터리다.
이 회사는 태국에 위치한 공장에서 연간 2.4GWh 규모의 열배터리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유럽에서 3기의 상업용 시스템을 추가로 제작 중이다.
론도는 2023년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람코 등으로부터 6000만달러(약 865억원)를 투자받았고, 2024년 5월에는 아람코와 기가와트급 프로젝트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또 포르투갈 전력회사 EDP와 협력해 유럽 내 산업 고객에게 열에너지 공급 서비스를 추진 중이며, 올해 초에는 7500만유로(약 1260억원)를 추가로 조달해 유럽 3개 프로젝트를 지원할 계획이다.
■ 산업용 열에너지, 탄소중립의 ‘마지막 퍼즐’
전 세계 탄소배출의 절반은 ‘열’을 만들어내는 공정 과정에서 발생하며, 그중 상당수가 철강·시멘트·화학 등 산업용 고온 공정에서 비롯된다.
배터리가 전력 저장의 해결책이었다면 열배터리는 ‘고온 산업열’ 탈탄소화의 열쇠로 평가된다.
국제 장기저장협의체(LDES Council)에 따르면 열에너지 저장 기술은 2040년까지 매년 5400억 달러(약 730조원)의 에너지 및 시스템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오고, 장기저장 설비 용량을 2~8TW까지 확대할 잠재력이 있다.
오도넬은 “이 기술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이라며 “하지만 지금 바로 쓸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편 국제적으로 몇몇 스타트업들도 이 분야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호주의 MGA 터멀(MGA Thermal)은 올해 4월에 산업용 증기 열 시범 프로젝트를 완료했으며, 미국 스타트업 몰타(Malta Inc.)의 스페인 자회사는 6월에 BBVA 은행과 ‘펌프식 열 저장’ 프로젝트의 수익 구조를 지원하는 계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