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AI로 사회적가치 측정 시대 열렸다"…도쿄포럼서 '새로운 자본주의' 역설
"재무가치만 보던 자본주의, 사회적 가치 포함해야 지속가능" SK, 사회적가치 측정 실행…"의사결정 방식 근본적으로 바뀌어" "한국경제, 마이너스 성장 위기...한국과 일본 경제협력 절실"
[ESG경제신문=김도산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사회적 가치 측정을 통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환경 위기와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기업의 재무 성과뿐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영향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보상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21일 일본 도쿄대에서 열린 '도쿄포럼 2025' 개회식에서 "전통적 자본주의는 재무적 성과에만 집중한 나머지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한 보상 체계가 거의 부재했다"며 "이로 인해 환경 파괴, 불평등 심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AI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사회적 가치의 정량적 측정이 가능해졌으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기술이 가능케 한 'ESG 측정 혁명'
최 회장이 제시한 핵심 논점은 사회적 가치의 측정 가능성이다. 과거 사회적 가치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존재했고, 이를 정량화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됐다. 데이터 수집의 어려움, 복잡한 인과관계 분석의 한계, 이해관계자별 영향 평가의 불확실성 등이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기술 혁신은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있다. 그는 "디지털 기술과 AI는 사회적 가치 측정의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며 "이제 기업의 탄소 배출, 일자리 창출, 지역사회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AI는 방대한 공급망 데이터를 추적해 인권 침해나 환경 오염 리스크를 사전에 감지하고, 기업 활동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또한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통해 지속적으로 측정 방법론을 개선하고, 산업별·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표를 개발할 수도 있다. 최 회장은 이러한 기술적 도약이 자본주의 체제 전환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SK의 선도 사례: 사회적 가치를 KPI로
최 회장은 SK그룹이 이미 사회적 가치 측정 시스템을 경영에 통합해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SK는 2018년부터 DBL(Double Bottom Line) 경영을 도입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각 계열사는 일자리 창출, 납세 기여, 환경 영향, 지역사회 발전 등 다양한 항목을 평가받으며, 긍정적 영향은 플러스, 부정적 영향은 마이너스로 환산해 '순 사회적 가치'를 산출한다.
"측정이 시작되면 의사결정의 기준이 바뀐다"는 것이 최 회장의 주장이다. 그는 "과거에는 재무 수익성만으로 프로젝트를 평가했지만, 이제는 사회적 가치를 함께 고려한다"며 "단기 수익은 낮더라도 장기적으로 사회적 가치가 큰 사업에 자원을 배분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SK의 임원 성과 평가에는 재무 지표와 함께 사회적 가치 창출 실적이 반영된다. 환경 오염을 줄이거나 취약계층 고용을 늘린 임원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반대로 사회적 가치를 훼손한 경우 페널티가 부과된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질적 인센티브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최 회장은 "기업의 핵심성과지표(KPI)가 재무 중심에서 사회적 가치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단순히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매년 지속적으로 이를 높이는 것이 경영 목표가 됐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최 회장이 제시한 '새로운 자본주의'는 기업의 자선이나 윤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시스템적 인센티브 구조를 통해 사회적 가치 창출이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회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면,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금융 상품, 세제 혜택, 정부 조달 우대, 투자 유치 등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탄소중립에 기여하는 기업에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거나, 사회적 가치가 높은 기업의 주식에 기관투자자들이 더 많은 자금을 배분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EU는 이미 녹색 분류 체계(Taxonomy)를 통해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정의하고, 이에 부합하는 프로젝트에 금융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최 회장의 제안은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사회적 가치 측정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재무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구조로 진화한다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훨씬 더 견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단순히 ESG 공시 의무화를 넘어, 사회적 가치 창출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생태계를 조성하자는 비전이다.
한국 경제 위기와 한일 협력의 절실함 토로
최 회장은 이번 도쿄포럼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모델 탐색'을 주제로 열린 '비즈니스 리더 세션' 패널로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 마리안 베르트랑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경제학 석좌교수, 고지마 후히토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 김선혁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호시 다케오 도쿄대 경제학과 교수 등 학계 및 경제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에 대해서도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수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며 저성장 고착화, 산업 경쟁력 약화, 인구 감소 등 복합적 요인들이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반도체,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중국의 추격과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으며, 청년 실업과 가계부채 등 내수 시장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 회장은 AI를 중심으로 한 혁신 투자와 한일 경제 협력 강화를 돌파구로 제시했다.
그는 "AI 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지원하는 제도적 인프라가 시급하다"며 "규제 완화, 세제 혜택, R&D 지원 확대 등을 통해 민간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AI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저비용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필요한 방향"이라고 덧붙였다.
한일 협력의 필요성도 특별히 강조했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은 저출산·고령화, 제조업 경쟁력 약화, 에너지 전환 등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양국이 협력해 AI 기반 사회적 가치 측정 플랫폼을 개발하고, 청정 기술과 디지털 혁신에서 공동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의 반도체·배터리 기술과 일본의 소재·부품 역량을 결합하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양국이 공동으로 AI 데이터센터를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전환하고, 탄소중립 기술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킨다면, 지역 경제 블록으로서의 입지도 강화된다.
최 회장은 "지금은 한일 양국이 과거사를 넘어 미래 지향적 협력을 강화해야 할 때"라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 협력, 인적 교류, 공동 연구개발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최종현학술원과 도쿄대가 공동 주최하는 도쿄포럼이 바로 그러한 협력의 플랫폼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확산 가능성과 과제
다만 최 회장이 이번 포럼에서 제시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사회적 가치 측정의 국제 표준 마련이다. 현재 GRI, SASB, TCFD 등 다양한 프레임워크가 존재하지만 통일된 기준은 없다.
둘째, 측정 과정에서의 자의성과 그린워싱 방지를 위한 제3자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셋째, 중소기업과 개도국이 측정 비용 부담으로 배제되지 않도록 기술 지원과 역량 강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아울러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반ESG 정책으로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당분간 어렵다는 점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EU와 중국, 인도 등이 손을 잡고 있지만 한계가 따른다.
그럼에도 최 회장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으려면,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벗어나 둘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며, AI라는 강력한 도구가 등장한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적 전환을 이룰 최적의 시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