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평가기관 "믿을만한가" 물었더니...기업과 투자자 "아니올시다"
환경컨설팅 업체 ERM, 투자자·기업 상대 조사 결과 그나마 가장 믿을 만한 평가기관으로는 CDP 꼽혀 MSCI도 신뢰 그리 높지 않아...국내 기관은 '관심 밖'
[ESG경제=이진원 기자] 지구촌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경영으로 전환하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기업의 ESG 활동 평가기관들의 평가 결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기업과 투자자의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환경컨설팅 업체인 ERM이 투자자를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 투자전략 수립 시 ESG평가를 반영해 투자해 달라는 고객 요청을 받는 투자자 비중이 2018/19년 조사 때 12%에서 지난해 43%로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ESG평가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는 5점 만점에서 3.31점에 그쳤다. ESG 평가기관들의 ESG평가 결과에 대한 피평가 기업들의 신뢰도는 2.91점으로 이보다 더 낮았다. 투자자나 기업들이 관심있게 보고는 있지만 평가 결과를 충분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인 셈이다. ESG평가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투자자뿐만 아니라 기업들 사이에서도 ESG평가에 대한 불만이 줄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라는 게 ERM의 분석이다.
실제로 ERM이 투자자와 기업에게 ‘품질(quality)'과 ‘유용성(usefulness)’ 면에서 ESG 평가기관들의 평가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투자자의 경우 절반 이상, 기업은 절반 가까이가 ESG 평가기관의 해결 과제로 ‘평가 방법상의 일관성(consistency)과 비교가능성(comparability) 강화’를 꼽으며 높지 않은 점수를 줬다.
평가 ‘품질’과 ‘유용성’ 점수도 보통 수준
ESG평가에 대한 기업들의 평균 품질 등급은 2018/19년 조사 때의 5점 만점 중 3.54점에서 2022년 3.27점으로 오히려 13%가 하락했다. 유용성 점수도 같은 기간 3.34점에서 3.17점으로 5% 떨어졌다. 크게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ERM은 ‘기로에 선 ESG평가(ESG Ratings at a Crossroads)’란 보고서에서 “투자자들이 ESG 평가기관들로부터 얻는 평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서 자체적으로 ESG 분석과 평가 시스템을 갖춘 뒤 평가기관들은 데이터 정보기관 정도로만 여기는 곳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투자자나 기업으로부터 큰 신뢰를 얻지 못하는 ESG 평가기관들 중에 그나마 가장 신뢰할만 곳은 어디일까?
CDP의 평가 신뢰도 가장 높아
ERM이 실시한 조사에선 세계적인 지속가능경영 기관인 탄소공개정보프로젝트(CDP·Carbon Disclosure Project)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게 나왔다. CDP는 과학적 분석을 기반으로 환경(E) 평가에 강한 특성을 보인다.
ERM이 투자자와 기업들에게 ESG 평가의 ‘품질’과 ‘유용성’의 신뢰도를 별도로 질문한 결과 이 4 항목 중 3 항목에서 CDP의 평가를 신뢰한다고 답한 응답자, 즉 5점 만점으로 따져 4~5점을 준 조사 참여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CDP 외에 ISS-ESG, 서스테이널리틱스(Sustainalytics), S&P 글로벌 ESG, MSCI 등이 평가 신뢰도 면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저스트 캐피탈(JUST Capital)과 서스테이너블 피치(Sustainable Fitch), 레피니티브(Refinitiv)에 대한 평가를 신뢰한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낮았다.
<ESG 평가기관들의 평가 품질과 유용성 조사 결과>
탐 라이헤르트(Tom Reichert) ERM 최고경영자(CEO)는 보고서 서문에서 “ESG 성과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ESG 평가 역시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투자자와 기업들은 평가의 정확성과 활용성에 대해 보통 정도의 신뢰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관심도와 신뢰도의 불일치라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향후 평가 생태계의 신뢰성 확보와 유지를 위해서 변신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작된 ESG 평가 논란 본격화
ESG 평가기관들의 평가 신뢰성 논란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란이 본격화한 계기는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전쟁 발발 직전까지만 해도 ESG 평가기관들의 ESG 우수 평가를 믿고 이 등급을 받은 러시아 기업들에 투자한 펀드들이 많았는데, 전쟁 발발로 된서리를 맞았다. 예를 들어, 유럽의 ESG펀드들은 러시아에 무려 95억 달러(약 12.5조 원)나 투자하고 있던 와중에 큰 손실을 입었다.
비판은 ESG 평가기관들이 사전에 이런 리스크를 예상해서 러시아 기업들의 등급을 낮췄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 모아졌다. 일부 전문가는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할 당시 이미 평가기관들이 러시아와 러시아 기업들에 대한 ESG 등급을 낮췄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2월 24일 전쟁 발발 후 2주가 지난 3월 8일이 돼서야 MSCI는 B였던 러시아의 ESG 등급을 CCC로 강등 조치했다.
정보의 접근성의 제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ESG 평가기관들의 평가 역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평가기관들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ESG펀드들이 그들의 평가를 투자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가 ESG 평가기관들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했다.
결국 전쟁 전 러시아 기업들에 높은 등급을 준 ESG 평가기관들은 혹독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 사건은 평가 맥락이 급변할 때 ESG 평가기관들이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ESG 정보공시 의무화가 평가기관들에 미칠 영향은?
이런 가운데 글로벌 기업들의 ESG 관련 정보의 공시 의무화가 2025년부터 본격 시행된다. ESG공시의 국제 표준안을 만들고 있는 ISSB(국제기속가능성기준위원회)는 올 6월까지 공시 기준안을 완성하고, 유예기간을 거쳐 2025년부터 공시 의무화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금융위원회도 2025년부터 ESG 정보공시를 대기업부터 의무화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국제 표준안에 따라 ESG 관련 정보를 속속들이 공시하기 시작하면 ESG평가기관들의 역할과 위상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전문가 의견은 엇갈린다.
믿을 만한 공시 데이터가 확보되는 만큼 ESG 평가기관 평가 결과의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반면, 투자자와 기업 등 ESG평가 수요자들이 굳이 평가기관들에 의존하지 않고도 공시된 정보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체적인 평가를 비교적 수월하게 할수 있게 되면서 ESG평가기관들이 더 외면을 받게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ESG 평가기관들의 입지는 갈수록 더욱 좁아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평가기관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가운데 국내 평가기관들의 점수나 등급을 활용할 해외 투자자나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