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지속가능성 '흔들'...‘유럽 병자’ 소리 다시 듣게된 까닭
현실 안주, 미래 신산업 투자 소홀에 에너지정책 실패 제조업 침체로 성장률 바닥, 우경화 정치 불안도 가세
[ESG경제=김상민 기자] ‘제조업의 나라, 독일’은 1990년대 말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고임금-저효율 경제의 표본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2~2005년 당시 슈뢰더 총리는 ‘하르츠 개혁’이라고 불리는 노동개혁으로 경제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그 결과 독일은 다시 ‘유럽의 경제 심장’으로 우뚝 자리매김했다. 다만 노동계의 반발로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은 정권을 잃었다. “정권은 잃었으나 경제를 살렸다. 위대한 정치의 모습이었다.” 당시 슈뢰더 총리에게 쏟아진 찬사였다.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개혁’을 성공시킨 그의 결단에 경의를 표시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것은 개혁이야말로 ‘점진적으로 꾸준히 추진’해야 하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중도에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면 효과가 반감되거나 없어지고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
하르츠 개혁이 추진된 지 20년이 흘렀다. 독일은 ‘유럽 경제의 심장, 유럽 경제의 엔진’에서 다시 한번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라 나온다.
독일 제조업의 상징 ’독일차‘...中 저가공세로 '안방 위협’
우리나라 축구 선수 김민재가 뛰는 바이에른 뮌헨의 연고지 뮌헨. 5일(현지시간) 뮌헨 시내 한복판에서는 유럽 최대 모터쇼 ‘독일 IAA 모빌리티’가 열렸다.
이번 모터쇼의 최대 화제는 세계 1위 전기차 매출을 올린 중국 토종 전기차업체 비야디(比亞迪·BYD)의 약진. 비야디는 6종의 모델을 내놓았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하시면 한 달 안에 배달됩니다”는 문구와 함께 최저 3만 유로(약 4,300만원)의 가격표로 고객의 눈길을 끌었다. 맞은편 유럽 최대 자동차회사 폭스바겐 전시장에서 가장 가격이 싼 차가 비야디의 가장 비싼 차 수준(7만 유로·약 1억원)이었다.
독일차들은 세계 최강의 내연기관차에 안주하다가 전기차 경쟁에서 뒤처진 모습이다. 특히 폭스바겐의 경우 프리미엄 전기차시장을 공략하는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와 달리 일반 상용차에서 경쟁력을 가져야하므로, 비야디의 약진이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올리버 블루메 폭스바겐그룹 최고경영자(CEO)도 IAA 모빌리티 콘퍼런스에서 “우리는 배터리 규격을 통일했고, 앞으로 생산할 우리 자동차의 80%에 이를 활용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비용을 50% 절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모빌리티를 제공할 우리의 길"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은 이번 IAA 모빌리티에서 '모두를 위한' 2만5,000유로(약 3,582만원)짜리 전기차 ID.2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2025년 말 출시 목표지만, 과연 폭스바겐이 중국의 저가 공세를 얼마나 견뎌낼지 주목된다.
독일, 주요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역성장...IMF, -0.3% 예상
독일의 권위 있는 민간경제연구소 'Ifo'의 한스 베르너 신(75) 명예소장은 ‘독일의 제조업 정체와 높은 에너지 가격’과 관련해 미국 CNBC 방송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유럽의 병자라는 별칭에 대해) 이것은 단기적인 현상은 아니다. 독일 산업의 심장이고 많은 것들이 결부된 자동차 산업과 관련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자동차는 지난해 독일의 주요 수출품이며, 해외에 팔린 제품의 15.6%를 차지할 만큼 핵심이다.
‘수출대국’인 독일은 지난해 5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10억 유로(10.3억 달러·1.4조원)에 달하는 대외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잠시에 불과하다지만 독일이 오랜 무역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떨어지는 묘한 순간이었다. 이후 독일은 올해 6월에는 187억 유로(26.8조원)의 무역흑자를 기록했으나 수출 자체는 부진하다.
한국은행 미국유럽경제팀은 3일 내놓은 '최근 독일경제 부진 배경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독일 경제가 다시 '유럽의 병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경제는 지난해 4분기(-0.4%), 올해 1분기(-0.1%)까지 2분기 연속 역성장했고 올해 2분기(0.0%)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 7월 올해 독일의 경제 성장률을 –0.3%로 전망하면서 주요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독일이 올해 역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독일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목표의 타당성’에 대해 의심한다.독일은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 경제난에 직면했다가 급속한 산업화를 진행하던 중국에 공작기계 등 자본재와 차량 등을 대거 수출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문제는 자동차·기계·화학 등 구(舊)산업 위주 경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新)산업 투자를 소홀히 한 것. 독일의 유일한 소프트웨어 대기업인 SAP도 1975년에 설립돼 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독일의 주요 시장이던 중국도 사회기반시설과 부동산 투자의 경기부양 효과가 떨어지면서 고성장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됐다. 특히 한때 독일 제품을 사들이는 고객이었던 중국 기업들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로 부상했다. 경제를 살릴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는 셈이다.
탈원전 실행한 독일, 높은 에너지가격으로 시름
현재 독일 정부가 주목하는 목표 중 하나는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는 것. 하지만 이 계획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 가스 공급망에서 분리되기를 바라고 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독일의 기후 목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비용 부담에 혐오감을 느끼고 기후위기 대응에 반대하는 소위 '그린래시(greenlash)‘가 부상하면서 ’지속가능한 유럽‘으로의 전환에 대한 대중의 환멸 징후도 확산하고 있다. 독일은 올해 4월 모든 원전의 가동을 멈추면서 ’탈원전‘을 밀어 붙였는데, 그 결과는 ’높은 에너지 가격‘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결과 정치적인 파장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한스 베르너 신(75) 명예소장은 지난 6월 처음으로 시장을 탄생시킨 극우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인기가 오르는 것과 관련해 "반발 조짐이 뚜렷하다…사람들이 이제 우경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현재 정책에는 실용주의가 약간 빠져있다”고 한 대목이다. ‘기후목표 달성, 탈원전’ 같은 이상은 좋았으나 민생에 주름살을 가게 한 ‘비(非)실용주의 정책’들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독일의 지친 모습이 다른 나라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SG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