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ESG vs 진보의 ESG
보수와 진보 모두 ESG를 현실의 이익 챙기기 수단 삼아 미래세대 지속가능성 위기 관점에서 ESG 실천 돌아봐야
우리 회사는 보수적이라서...
기업들과 ESG 미팅을 하다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우리 회사는 보수적이라서 ESG 실행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말의 뜻을 풀어보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는 것도, 에너지 효율화를 위해 시설과 장비를 교체하는 것도, 재활용 원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권영향평가를 하는 것도, 공급망 협력업체와 ESG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모두 기존에 하던 경영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에 시도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고객사(발주처)의 요구사항에 맞추는 정도가 최선입니다." 보수적이기 때문에 ESG 실행이 어렵다고 하는 기업들의 공통점은 유럽이나 미국의 고객사가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것이다. 지속가능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실행하기 보다는 외부의 강력한 요구사항이 있을 때 마지못해 대응하는 방식이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 ESG 경영의 현주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회사 대표님께서 ESG 경영에 진심이라서 정말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라는 회사도 가끔 있다. 그래서 직접 만나 얘기를 해보면 대체로 결론은 이렇다. "돈 들어가는 것 말고, 일단 쉽게 할 수 있는 것들로 제안 부탁드립니다. 우리 회사 재정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해서 당장 크게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회사들이 원하는 것은 ESG가 요구하는 (돈 들어가는) 비즈니스의 혁신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돈 안 들어가는) 사진찍기 좋은 특별 활동인 경우가 많다.
래리 핑크가 ESG 용어를 쓰지 않기로 한 이유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회사인 블랙록의 회장 래리 핑크 회장이 ESG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얼마 전 있었다. 래리 핑크는 그 이유에 대해 ESG가 정치 쟁점화되고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작년 말과 올해 초 MSCI와 블룸버그 등은 2023년 ESG 투자 전망을 통해 "정치 쟁점화"를 예측했다. 잘 알다시피 미국의 공화당은 ESG를 싫어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던 사건이다.
석탄, 석유, 가스 기업의 자본이 공화당을 지원하기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는 것을 공화당이 좋아할리 없다.
반면, 파리기후협약을 이끌어 내는데 큰 리더십을 발휘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은 ESG 확산에 적극적이었다. 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이 공화당의 돈줄을 마르게 하고 민주당 세력을 확대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 후 집무실에서 처음 서명한 것도 파리기후협약 재가입 문서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ESG를 놓고 싸우고 있고, 양 진영에 돈을 대고 있는 투자사와 기업들도 덩달아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양쪽 진영의 돈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블랙록 래리 핑크 입장에서는 ESG라는 단어라도 사용하지 않는 게 호구지책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전세계 지속가능성, ESG 논의에서 미국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럽연합(EU)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EU는 지난 6월 유럽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정보공시 기준인 ESRS(European Sustainability Reporting Standards)를 발표했다. ESRS의 기반이 되는 것이 CSRD(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이고 CSRD는 NFRD(Non-Financial Reporting Directive)에 따른 것이다. NFRD는 EU가 2003년에 발표한 『EU 기업 회계 현대화 지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EU 기업 회계 현대화지침은 2001년 EU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EU 지속가능발전 전략』에 그 뿌리가 있다. EU 지속가능발전 전략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지속가능한 EU를 건설하기 위해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기를 직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EU를 비롯한 인류의 지속가능성 위기는 국경, 민족, 정치적 배경, 경제적 이익, 종교와 문화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EU와 세계의 미래세대들이 현재의 번영을 이어받기 위해서 EU의 모든 정부와 민간, 기업이 해야 할 지금의 일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모든 방식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이러한 미래세대적 관점에서 보면 보수와 진보의 견해 차이란 있을 수 없다. 현재 ESG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다툼은 미래세대는 안중에 없이 현실의 이익과 이권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한 밥그릇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 ‘지속가능성 위기’ 얼마나 인식하나
지속가능경영과 ESG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지속가능성 위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지속가능성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지속가능경영을 해야 할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되고, ESG 실행의 동력도 잃게 된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는 아직도 CSR, ESG, 지속가능경영을 한때 지나가는 트랜드로 가볍게 여기거나, 발주사 등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귀찮은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이 기업들의 이런 행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수 언론은 ESG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취재해 기사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ESG가 기업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으니 ESG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러들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진보쪽 언론은 기업의 ESG 경영이 대부분 그린워싱이라고 비판하지만 건설적인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
경제지들이 그나마 ESG 기사를 많이 내보내지만 내용을 뜯아보면 돈벌이 수단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발굴 취재 기사보다는 기업들이 내놓은 자화자찬성 ESG 홍보물들을 단순 전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ESG 관련 기사들이 천편일률적이다. 또한 엉성한 ESG 랭킹을 보도하며 기업에 광고나 협찬을 요구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시민단체들 또한 ESG 경영에 대해 큰 틀에서의 의견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재벌 거버넌스 구조나 환경오염 등 부분적인 문제만 파고들어 지적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사회불평등으로 인한 인류의 지속가능성 위기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양쪽 모두에게 이미 닥친 위기이다. 불난 집을 보고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니편 내편,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멍청한 짓 아닌가.
ESG, 지속가능경영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를 가를 때가 아니다. EU 등의 외압 때문에 억지로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미래세대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유승권 이노소셜랩 ESG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