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의 미세 플라스틱, "질병의 그림자 조용하게 드리운다"
美 컨슈머리포트, 85개 제품 중 84개서 플라스틱 성분 검출 델몬트와 버거킹 등 익숙한 제품도 다수 포함 전문가들, "규제 당국 식품 내 플라스틱 기준치 높여야"
[ESG경제=김연지 기자] 미세 플라스틱이 조용하게 우리의 식탁을 점령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의 비영리 소비자단체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s)는 다양한 식품에 플라스틱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고 조사 결과를 내놓고, 규제 당국이 식품 생산 및 유통 과정에서 먹거리에 녹아드는 플라스틱에 대한 안전성을 재평가할 것을 촉구했다.
미세 플라스틱, 너는 누구냐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좀처럼 썩지 않고 아주 미세한 부스러기로 해양과 토양에 남아 동물과 식물에 스며들고, 결국 먹이사슬을 통해 사람의 입으로까지 들어오게 된다.
컨슈머리포트는 지난 4일(현지시각) 보고서를 통해 사람들이 많이 소비하는 약 100개의 식품 및 식품 포장을 조사한 결과, 대다수 제품에서 프탈레이트와 비스페놀 같은 플라스틱 성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델몬트의 슬라이스 복숭아, 페어라이프 코어 파워의 고단백 초콜릿 밀크 셰이크, 버거킹의 치즈 와퍼 등에서 높은 함량의 프탈레이트가 발견됐다. 유기농을 표방하는 브랜드의 제품도 예외는 없었다. 한국에서도 직구를 통해 구입하거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유통마트에서 볼 수 있는 애니스 올가닉(Annie's Organic)의 치즈 라비올리 캔에서는 조사 제품 중 가장 많은 프탈레이트가 발견됐다.
프탈레이트는 85개 조사 식품 중 84개 제품에서 발견된 성분이다. 대표적인 가소제로 쓰이는 프탈레이트는 플라스틱을 유연하고 내구성 있게 만드는 화학 물질이다. 비스페놀 역시 테스트 샘플 중 약 79%에서 검출됐다.
이들 성분은 모두 내분비 교란 물질로서 에스트로겐을 포함 수많은 호르몬의 생산과 조절을 방해할 수 있다. 호르몬 교란은 아주 미세한 정도라도 당뇨병, 비만, 심혈간 질환, 암, 조산, 신경발달장애 및 불임을 낳을 수 있는 치명적인 현상이다.
호르몬 교란과 그로 인한 각종 질병은 미세한 양일지라도 지속적으로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이것이 인체에 축적될 때 발생할 수 있다. 보스턴 대학의 글로벌 공중 보건 책임자이자 소아과 의사인 필립 랜드리건(Philip Landrigan) 박사는 컨슈머 리포트를 통해 "모두가 한꺼번에 죽는 비행기 추락 사고와 달리, (호르몬 교란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은 수년에 걸쳐 죽는다."고 말했다.
다만 이미 바닷물과 토양에 퍼져있는 미세 플라스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상황. 과연 미세 플라스틱을 어느 정도까지 섭취하면 인체에 유해한지 그 한계치에 대해선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입증된 게 없는 상태다.
플라스틱 규제 너무 느슨
보고서는 플라스틱 성분이 음식에 들어가는 원인을 네 단계에 걸쳐 설명했다. 먼저 다양한 산업폐기물과 부산물이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이 과정에서 음식의 원재료가 되는 채소류, 육류, 해산물에 미세 플라스틱이 축적된다.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축적된 원재료를 제품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튜브, 컨베이어 벨트, 장갑 등과 접촉하며 플라스틱이 유입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완제품을 포장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비닐, 캔, 플라스틱 통들과 접촉하게 되고, 이들이 음식 속 미세 플라스틱으로 누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컨슈머 리포트는 규제 당국이 설정한 플라스틱 성분 기준치가 너무 느슨하다고 지적하며, 더욱 엄격한 미세 플라스틱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실제로 미국소아과학회(American Academy of Paediatrics)에 2013년 게재된 <청소년의 요로 프탈레이트 및 인슐린 저항성 증가> 논문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 규제 당국이 안전하다고 설정한 식품 내 플라스틱 성분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플라스틱 함유량만으로도 인슐린 저항성, 고혈압, 생식기 질병, 조기 폐경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컨슈머 리포트의 튠데 아킨레예(Tunde Akinleye) 식품안전연구원은 “이러한 화학 물질에 대한 노출은 식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스에서 발생하므로 단일 식품에 대한 ‘안전한 한계’를 정량화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매우 낮은 수준에서도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컬럼비아 대학 공중보건대학의 아미 조타 교수 역시 보고서를 통해 “식품에 화학물질을 (극소량일지라도) 허용한 결정은 증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즉, 어느 정도의 미세 플라스틱 함유가 안전한지 명확하지 않다면 지금 보다 더욱 안전한 수준으로 허용치를 낮추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해안 미세 플라스틱 농도…㎥당 최대 1.8개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미세 플라스틱에 대한 조사와 대응책이 본격 논의되고 있다. 수도권 경기도에 접한 서해안의 연평균 부유 미세플라스틱 농도가 1t(㎥)당 평균 1.4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도 해양수산자원연구소는 지난 2022년 서해안 풍도·입파도·구봉도·화성방조제·시화방조제 부근 등 5개 지점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채취해 조사했다. 그 결과 화성방조제 부근에서 연간 평균 ㎥당 1.8개로 가장 높은 농도를 보였고, 가장 낮은 지역은 시화방조제 부근으로 ㎥당 1.11개였다.
서해안의 플라스틱은 국내보다 중국에서 흘러드는 게 다 많은 상황. 동해안과 남해안은 서해안에 비해 미세 플라스틱의 농도가 낮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