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디스카운트 주범은 상장회사들이다
오너와 경영진, 일반 주주 돈을 내 돈처럼 주물러 거버넌스 개혁 성과 내는 일본 증시 눈여겨 봐야 '코리아 밸류업 프로그램'에 상장사들 '액션' 기대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
오리온이 해외 자회사를 통해 5500 억원을 들여 레고켐바이오 사이언스 지분 26% 인수한다고 공시한 뒤 주가는 이틀간 23% 폭락했다. 시가총액 1조원 이상이 증발한 셈이다.
오리온 대주주와 경영진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외국인들이 투매하면서 외국인 지분율도 42%에서 38%로 하락했다. 외국인이나 국내 일반 투자자들은 초코파이로 유명한 두자리수 영업이익률의 우량 제과회사에 투자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름도 생소한 바이오회사에도 투자한 셈이 되자 주식 투매로 '반발'했다.
오리온이 인수 자금으로 쓸 5500 억원은 지난 3년 간 영업이익 평균의 1.4배, 자기자본의 20%에 해당한다. 레고켐은 이 회사 CEO 표현대로 5년간 1조 원 이상의 연구개발(R&D) 투자가 필요한 고위험 고수익 비즈니스다. 이게 잘못되면 오리온은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오리온,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표적 사례
오리온의 레고켐 투자는 국내 증시에서 자주 발생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대표적 사례다. 오너 대주주가 일방적 의사결정을 내릴 때 이를 경영진이 그대로 따라가고, 권력기관 출신자와 교수들 중심의 사외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는 눈뜬 장님처럼 반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리온 이화경 부회장 패밀리가 바이오 투자에 관심 있다면 (일반 주주의 돈이 아닌) 본인 개인 자금 또는 패밀리 지분이 67%인 오리온홀딩스를 통해서 투자 집행하는 것이 옳았다.
미국에서 거버넌스 의식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일론 머스크도 엑스(X, 옛 트위터)를 인수할 때 개인 돈 440억 달러(58조 원)를 투입했다. 테슬라는 엑스 인수에 1달러도 넣지 않았다. 개인 돈과 주주들 몫의 회삿돈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이다.
오리온 사례를 보면 상법 개정을 통해 주식회사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 이익”을 반드시 추가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지금은 이사 충실의무를 막연하게 '회사 이익'으로 한정한다. 길거리에서 남의 돈을 훔치면 범죄인데 회사에서 일반 주주의 이익에 반하여 그들의 돈을 유용하는 것은 왜 범죄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15년 이상 사외이사 자격으로 여러 기업의 이사회를 참석해 보니 일부 사외이사는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규정이 없어서인지 의안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발언 한마디 없이 통과시킨다. 심지어 이사회 회의 중 카톡하는 분들도 있었다.
주주보호 의무가 없기 때문에 사외이사들은 회사가 원하는 대로 하면 임무 완수이고 본인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규정이 추가되지 않으면 한국 기업의 이사회들은 앞으로도 일반 주주들의 의사에 반하는 의안을 계속 승인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국내 간판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류 제품들을 생산해 품질을 인정받지만, 자본시장에선 이·삼류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실물경제와 자본시장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왜 삼성, 현대, LG 모두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을까? 바로 기업 거버넌스의 낙후성 때문이다.
한국 주식 푸대접은 나쁜 거버넌스 때문
국내 투자자나 외국인들은 경험적으로 한국 주식이 매력 없다고 생각한다. 위험자산인데도 채권금리보다 못한 투자성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MSCI 에 의하면 한국 주식은 과거 3년 간 연 평균 2%의 손실을 냈다. 평균 2%선의 배당수익을 감안하면 3년간 코스피는 매년 평균 4% 하락한 셈이다.
과거 10 년을 보면 코스피는 연 평균 5% 총수익(2% 배당수익 포함)을 만들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과거 10년 간 코스피 주가 상승은 제로에 가깝다.
일본은 10여년 전부터 기업 거버넌스 개혁을 착실히 수행해 왔다. 그 결과 일본 증시는 최근 3년 간 연 평균 12%, 10년 간 연 9%의 투자 성과를 달성했다.
기업 거버넌스가 훨씬 앞서있는 미국은 더 높은 장기 투자성과 (3년 간 연 9%, 10 년간 연 12%) 시현했다. 국내 초대형 증권사들이 제시하는 6개월 만기 발행어음 금리가 5.2%인데, 누가 한국 주식을 사겠는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범이 상장회사들인데 일부 언론이 상속증여세율을 인하하면 당장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듯이 보도한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징벌적 상속증여세의 완화는 필요하다. 다만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기업 가치를 장기간 파괴한 상장기업들이 '결자해지'하여 이런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말아야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본격적으로 해소될 것이다.
일본 증시가 디스카운트를 탈피한 비결
일본 주가는 올들어도 9%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 주가는 8% 하락했다.) 희비의 쌍곡선에 국내 투자자들은 울고 싶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아예 한국 증시를 떠나고 있다.
일본은 증권거래소가 중심이 되어 상장사 거버넌스 개혁을 지휘했고 많은 기업들이 따라줬다. 그 결과 국제금융시장에서 투자의 신뢰도가 크게 올랐다. 최근 일본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일본 기업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Burned the bridges)”고 칭찬한다. 바로 낙후한 거버넌스의 다리를 끊어버렸다는 의미다.
일본 기업들은 거버넌스 개혁에 있어 정부와 증권거래소에 떠밀려 시늉만 내는 않았다. 이러다간 망한다는 각오로 이사회를 중심으로 재무상태표를 뜯어서 제대로 구조조정하고 있다. 쓸데없는 사업과 자산을 과감하게 매각하면서, 주주들에 대한 보상을 확실하게 높여나가고 있다.
일본은 기업 거버넌스 측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가 정착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치열한 경선(beauty contest)에서 우리 기업들이 일본 경쟁사에게 완패 당하고 있다. 우리 기업의 제품 서비스가 좋지만, 거버넌스의 낙후로 투자 매력도가 상대적으로 계속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본 증권거래소의 거버넌스 개혁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다. 일본의 거버넌스 개혁 프로그램 핵심은 다음과 같다. “①기업은 매출과 이익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말고 주주 입장에서 자본비용과 투자효율성을 따져봐라. ②(경영진이 아닌) 독립된 이사회가 중심이 되어 주가 저평가 원인을 따져보고 해결책을 공표해라. ③이런 내용을 주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피드백을 액션에 반영해라.”
코리아 디스카운트, 상장사들이 '결자해지' 해야
일본의 액션 프로그램은 한국에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제대로 적용하면 국내 우량기업 주가가 2~3 배 뛰어오를 수 있다고 본다.
국내 기업들은 매출 및 영업이익의 성장, 영업이익률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우리 기업의 제품 경쟁력이 유지되는 한 단기 수익을 의미하는 손익계산서는 그런대로 괜찮게 꾸려 갈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의 열쇠는 회사 자산의 관리상태를 보여주는 재무상태표에 숨겨져 있다. 대주주 및 경영진의 일방적 의도에 따라 재무상태표는 방만하게 관리되어 일반 주주에게 돌아가야할 현금이 회사 곳간에 수십조원 쌓여있고 수조원 이상의 금액이 비핵심 자산에 묶여있다.
현대차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이 0.5 배에 불과하다. 1주당으로 따진 순자산 대비 현재 주가가 절반 수준의 헐값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PBR은 경쟁사인 대만 TSMC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 4대 은행보다 한국 금융지주회사들의 PBR이 낮다. 한국 은행주의 디스카운트(Korean bank discount)다. 국내 은행은 오너가 없어 상속증여세 때문에 자기 주가를 억누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다. 단순히 상속세제 합리화만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주가 디스카운트 문제를 자초한 당사자는 바로 상장회사들이다. 정부 정책이나 세제를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 변해야 한다. 결자해지하는 자세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아마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이번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탈출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금융당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기대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한대로 자본시장은 계층의 고착화를 막고 사회의 역동성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장터(marketplace)가 맞다. 윤 대통령이 주재한 지난 17 일 민생토론과 관련해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일본 사례를 참고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조만간 도입하겠다고 했다. 크게 환영하며 박수를 보낸다.
기업 거버넌스 개선을 통해 국내 자본시장이 살아나면 기업의 혁신 역량이 더욱 강화되고, 국민의 금융자산 가치가 쑥쑥 커져 노후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금융위원회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기업과 투자자들의 호응 아래 반드시 성공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