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풀뿌리 ESG’ 시대를 열자
ESG를 실행하기에 기업과 정부 노력만으론 한계 시민과 조직원들이 참여하는 '풀뿌리' 운동이 해법
지방자치제도를 풀뿌리(grassroots)에 비유한 것은 1935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가 처음이다. 풀의 잔뿌리가 물과 양분을 흡수해서 식물이 잘 성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듯, 지역의 크고 작은 정책부터 주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문제까지 지역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결정하고 해결하는 상향식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20세기에 널리 확산했는데 이 기간 동안 노동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시민권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개념을 강화시켰다.
20세기 후반에는 환경운동, 지역사회 개발, 소비자운동 등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는데 이러한 운동들은 지역 사회와 작은 단위 조직들에서 직접 참여를 통해 큰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발달하여 시민들이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의 문제에 대해 더 넓은 관심을 끌고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데 좋은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환경과 사회를 위한 풀뿌리 활동
현재 글로벌 탄소감축 압박과 기업의 지속가능 요구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트럼프가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되면 ESG는 끝날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당장 눈앞의 기후재난을 보자. 지구온도가 계속 올라가면서 해마다 기후재난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유럽은 이미 파리기후협약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법제도를 완비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더라도 이미 주요국의 정책을 넘어 세계 경제의 프레임이 된 ESG와 탄소감축 압박은 개발도상국까지 번지며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당장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ESG기후공시 의무화가 목전에 있고, RE100 캠페인이나 과학기반목표이니셔티브(SBTi) 같은 각종 넷제로 목표제에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참여하고 있다. 국내 상당수 대기업과 금융기관들도 이미 여기에 가입하였거나 가입 준비 중이다.
만일 약속한 목표 이행을 하지 않을 경우 기업 신뢰도에 큰 흠집이 생길 뿐 아니라, 각종 제재를 받거나 심한 경우 수출이 끊기고 글로벌 자본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 기업에게 ESG와 탄소중립 문제는 환경과 사회적 가치의 이슈를 넘어 경쟁과 생존 이슈가 됐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에 연결돼있는 중소·중견기업들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같은 강도의 목표 달성을 해야 하는 탄소 연좌제적 성격을 갖는다는 얘기다.
빠르면 2~3년 내에 공급망 체인에 속하는 중소 중견 기업들의 경우 대기업에 준하는 목표 설정과 달성을 요구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생존과 성장에만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기후와 공정 같은 주제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대응은커녕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상당하다.
탄소배출량 산정도 해야 하고, 감축 방안도 찾아야 하며, 임직원의 탄소 발자국도 지워야 하는데 인식도 부족하고, 대책도 한참 미흡하다. 정부의 지원도 중구난방이요 우왕좌왕이다. 대응을 제때에 못 할 경우 우려되는 피해는 1997년 외환위기를 방불케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나온다.
'풀뿌리 ESG'를 해법으로
필자는 최근 급박하게 돌아가는 글로벌 ESG와 탄소감축 요구에 대한 최선의 접근법으로 풀뿌리민주주의 방법론을 벤치마킹하여 ‘풀뿌리 ESG’를 제안하고 싶다. ESG 운동의 선두에는 기업과 정부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론 너무 부족하다.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기업이 따라가는 것은 '규제와 비용' 방식이다. 가다보면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기 십상이다.
이와 대비되는 풀뿌리 ESG는 지역사회나 기업의 구성원과 팀 단위에서 시작하여 환경보호, 사회적 책임, 투명한 거버넌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실천을 촉진하는 상향식 접근 방식을 말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현재 당면한 문제를 바로 보는 눈을 뜨게 하는 탄해력(탄소이해력, 카본리터러시)과 ESG 실전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 사회와 기업 특성에 맞는 실천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참여하는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나아가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모방한 다양한 협력 파트너십과 캠페인을 진행하고 지자체 등에 다양한 정책을 제안하고 국가의 ESG 정책에도 적극 협력한다. 블록체인, Ai, 소셜미디어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하여 투명성을 확보하면서 개인 단위의 기후행동 실천을 확대할 수도 있다.
이 접근법은 풀뿌리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당면한 특정 문제에 효과적이고 신속하며 효율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고 구성원들의 참여 의식도 고취하고 ESG 관련 법제도에 대해 적극적인 협조와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한 자연적 기반도 척박하고, 가족 중심의 유교주의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대한민국은 글로벌 탄소감축과 ESG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기 힘든 나라에 속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얘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 ESG’가 전국적 운동으로 일어나 우려되는 탄소위기 극복의 신선한 자양분이 되었으면 한다.
[박희원 넷제로홀딩스그룹 대표]
#박희원은 기업 및 지자체 등의 탄소중립, RE100 전략 수립을 지원하는 넷제로홀딩스그룹 대표다. 속초 등 지자체, 다수 대기업, 중소기업의 넷제로 전략을 자문하고, 현장의 ESG 실무자들을 위한 넷제로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공학박사(에너지자원공학) 학위를 땄다. '풀뿌리 ESG'를 주제로 <ESG경제>에 칼럼을 연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