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 기후공시 안착하려면...소송 등 '넘어야 할 산' 남아

전문가들, 초안보다 후퇴했지만 의미 있는 진전 스코프 1, 2 공시는 중대성 측면에서 의무화로 봐야 WP, 기후공시 생존 여부 SEC의 소송 대응 능력에 달려 국내 KSSB 공시기준 제정에 미칠 영향 크지 않을 전망

2024-03-08     이신형 기자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 로이터=연합

[ESG경제=이신형기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지난 2022년 3월 초안을 내놓은지 약 2년만에 ESG 기후공시 기준을 6일 확정 발표했다. 초안보다 후퇴했지만, SEC의 공시기준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국내의 한 ESG 공시 전문가는 ”SEC가 갖는 독립적인 지위를 고려할 때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상장기업들은 의무적으로 기후공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SEC 기후공시 대상 미국 상장기업은 약 2800개에 달한다.

다른 ESG 전문가는 ”가장 우려했던 것은 SEC가 미국 대선 전까지 SEC가 안 움직이는 것이었다"며 ”이런 상태에서 만약 공화당이 집권하면 미국의 기후공시 기준에 더 후퇴할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대선 전에 최종 결정이 내려져 다행“이라고 말했다.

소송전에서 살아남아야

다만 SEC의 기후공시가 안착하려면 공화당 정치인과 미국 재계가 제기하는 소송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SEC는 소송을 의식해 상당 부분 추정에 의존해야 하는 스코프 3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를 면제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기후 이슈를 다루는 것은 SEC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라는 주장과 함께 기후공시를 무력화하려는 소송전이 난무할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의 조지아주와 앨라배마주, 웨스트버지니아주 등 10개주가 즉시 소송을 제기했다. 기업 단체들도 소송을 예고하고 나섰다.

최근 몇 년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의회의 동의 없이 행정부가 환경규제를 도입하는 것에 제동을 걸어왔다. 워싱턴포스트는 SEC의 기후공시 안착 여부는 SEC의 소송 대응능력에 달려있다고 보도했다.

SEC의 기후공시가 기업의 탄소배출량을 낮추도록 유도하기 위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투자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정책이라는 점을 법원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SEC는 공시기준을 만드는 기관이자 증권감독기관이다. 따라서 투자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일은 SEC의 핵심적인 역할이다.

이처럼 외신은 기후공시의 안착 여부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를 소송으로 보고 있으나, 정권 교체도 변수가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국책임투자포럼의 김태한 수석연구원은 한국경제신문 기고문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 SEC 기후공시 폐기를 시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오는 2026년 6월까지인 게리 겐슬러 SEC 의장의 임기 중에는 민주당 소속 SEC 위원이 5명 중 3명을 차지해 기후공시 폐지를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추진하는 사안의 이행을 행정기관에서 거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폐지는 결국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 입법을 통해 기후공시 의무화 시행을 조기에 막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스코프 1, 2 배출량 사실상 의무 공시

SEC 기후공시기준은 스코프 1과 2 온실가스 배출량의 경우 기업이 온실가스 배출이 중대한(material) 문제라고 판단될 경우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시가 총액 7억 달러 이상인 상장 대기업들(LAFs)과, 2억 5000 달러~7억 달러 미만인 상장 기업들(AFs)이 공시 대상이다.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에 대한 제3자 인증도 받아야 한다.

2억 5000 달러 미만인 기업들과 미국 기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규모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 의무가 면제된다.

전문가들은 스코프 1과 2 공시의 경우 SEC 기후공시기준이 중대성을 언급하고 있어 사실상의 의무공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SEC의 중대성 개념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와 같은 투자자 중심의 재무적 중대성을 뜻한다.

한 전문가는 ”재무적 중대성은 투자자에게 중요한 정보면 다 공시하라는 뜻“이라며 사실상의 의무공시“라고 말했다.

그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투자자에게 중요한 정보인데 기업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공시하지 않았다면 ”공시에 대한 제 3자 인증 과정에서 이에 대한 지적이 나올 수 있고, 인증 기관도 이를 간과한다면 결국 투자자들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을 피하려면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이 전문가는 덧붙였다.

다수의 미국 기업 스코프 3 배출량 공시해야

환경단체 등은 SEC가 스코프 3 배출량 공시를 제외한 것에 반발하고 있다. 유엔이 지원하는 책임투자원칙(PRI)에 따르면 스코프 3 배출량은 기업의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75%를 차지한다.

하지만 다수의 미국 기업들은 스코프 3 배출량 공시를 피할 수 없는 처지다. 유럽연합(EU)이나 미국의 캘리포니아주가 스코프 3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EU ESRS 기준에 따른 ESG 공시는 우선 유럽 대기업에 적용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글로벌 리포팅 이니셔티브(Global Reporting Initiative)의 분석에 따르면 시차를 두고 3000개 이상의 미국 기업과 1300개 이상의 캐나다 기업이 ESRS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주도 SEC에 앞서 지난 10월 스코프 3 공시를 포함한 기후공시를 법제화했다. ISSB 기준을 기반으로 ESG 공시기준을 만들고 있는 호주와 브라질, 영국, 싱가포르 등도 스코프 3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ESG 공시 전문가는 이와 별개로 "투자자들이 스코프 3 배출량 공시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준 제정에 영향 크지 않을 전망

국내에서도 KSSB(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가 ISSB 기준을 기반으로 하는 ESG 공시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4월 최종 로드맵이 발표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업에 참여 중인 한 전문가는 ”스코프 3 공시 의무를 면제해준 SEC의 결정으로 국내 스코프 3 연기론자들의 주장에 다소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공시기준 제정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내 수출 대기업들은 결코 유럽시장을 외면할 수 없어 스코프3가 포함된 ESRS 공시기준에 대응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국내 ESG 공시 기준도 이를 반영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다만 ”ISSB는 스코프 3 공시를 1년 유예했지만, 국내에서는 1년 이상 유예가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ISSB 내부적으로 모든 나라에 1년 유예를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있다“며 ”4~5년은 너무 길고 3년 이내 정도의 유예는 괜찮다고 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