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결산] 주주행동주의 표결 4년 새 10배 늘어났지만...아직은 '찻잔 속 태풍'

국내 주주행동주의 대상 기업 4년 새 8개 → 77개로 급증 행동주의 주주제안 표결에서 패배한 경우가 훨씬 많아 회사측 '거수기’ 역할 많았던 국민연금... 수책위 변화 요구 커

2024-04-02     박가영 기자
그래픽=전국투자자교육협의회 제공

[ESG경제신문=박가영 기자] 지난 3월 마지막주, 올 정기주총 '슈퍼위크'가 지나며 대부분의 국내 상장사 정기 주총이 마무리됐다. 올 주총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국내외 주주행동주의 펀드들이 나서 회사측에 기업 거버넌스 개선이나 주주환원 확대를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김수연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에 의뢰한 ‘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대상 기업이 된 한국 기업은 2019년에는 8개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3년에는 77개사로 9.6배 급증했다.

김수연 연구위원은 “공격적 행동주의로 수익을 내는 헤지펀드뿐 아니라 자산운용사, 기관투자자까지 한국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 강도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에도 주총에서는 주주행동주의가 특히 주목을 받았다. 최근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를 강조하며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놓은 가운데,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주환원책 강화 캠페인이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과거 국내 주식시장에서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을 괴롭히는 '기업 사냥꾼'들의 나쁜 행동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젊은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주주행동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하고, 이들에게 의결권을 위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시화된 성과는 아직 적은 편이다. 회사측이 주총 표결에서 이긴 경우가 훨씬 많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이 행동주의 펀드들이 거둔 성과에 대해 아직 '찻잔 속 태풍' 내지 ‘절반의 승리’  등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이사회 진입 성공해 경영진에 '견제구' 던지기도  

행동주의펀드 플래쉬라이트 캐피탈 파트너스(FCP)는 KT&G의 정기주총을 앞두고 방경만 사장 후보의 선임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방경만 사장 후보는 28일 KT&G의 정기주총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9년 만의 대표이사 사장 교체였다.

하지만 행동주의펀드가 지지하는 사외이사가 선임되는 성과도 있었다. 기업은행이 추천하고 FCP가 지지한 후보인 손동환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사외이사로 선임돼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KCGI자산운용은 지난 28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을 앞두고 회사가 제시한 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건이 통과돼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이사 재선임 반대 이유와 자사주 소각 요구 등 자신의 목소리를 주총 의사록에 남기는 데 그쳤다.

다른 행동주의 펀드인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또한 금호석유화학을 상대로 한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패배했다. 차파트너스는 금호석화의 정기 주총에 ▲감사위원회 위원이되는 사외이사 선임의 건(김경호 후보) ▲이사회 결의 뿐만 아니라 주총 결의로도 자사주를 소각할 수 있도록 하는 정관 변경의 건 ▲정관 변경 후 2년에 걸쳐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도록 하는 자사주 소각의 건을 상정했다.

그러나 지난 22일 개최된 주총에서는 자사주 소각에 대한 주요사항 결의 주체를 이사회로 하도록 정관을 바꾸는 안건과 최도성 한동대 총장의 사외이사 선임 건 등 금호석화의 이사회가 제출한 안건들이 통과됐다. 찬성 비율은 각각 의결권 있는 주식 74.6%와 76.1%로 사측 안건 상정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다만 금호석화는 보유한 자사주의 절반을 3년간 분할소각하고 5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 목적으로 추가 취득하기로 했다. 나름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는 제스쳐를 취한 것이다.

차파트너스가 남양유업의 주총에 상정한 남양유업 발행주식을 10대 1로 액면 분할하는 안건도 부결됐다. 차파트너스는 남양유업의 지분 3%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15일 개최된 삼성물산의 주주총회와 같은날 개최된 다올투자증권의 주주총회에서도 행동주의 펀드들이 잇따라 패배했다.

삼성물산의 주주총회에서는 이사회가 올린 안이 의결권 있는 주식 77%의 찬성으로 채택됐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상정한 안건은 양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래스루이스의 지지를 받으며 주목을 받았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다올투자증권 최대주주 이병철 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 중인 2대주주 김기수씨는 비사이드에서 "2대주주로서 주주가치 제고와 책임 경영을 위해 회사 정상화 전까지 최대주주와 함께 배당을 받지 않겠다"며 "무리한 경영으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책임경영에 2대주주도 함께하겠다"고 소액주주들에게 의결권 위임을 호소했다. 그러나 '권고적 주주제안 신설' 주주제안은 찬성표가 26% 그치며 이병철 회장의 완승으로 돌아갔다.

한편 얼라인파트너스는 JB금융지주의 이사회에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 2명을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얼라인파트너스 측이 제안한 비상임이사 증원 안건이 부결됐으나, 이희승·김기석 사외이사는 각각 득표순위 1, 2위를 나란히 차지하며 선임됐다. JB금융그룹의 경영진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를 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와 대상기업의 표대결 결과 표=ESG경제 

국민연금 ‘스튜어드쉽 코드'  역할 못해... 수책위 구성 변화 요구 지적도 

다수의 주총에서 ‘캐스팅보트’로 불리는 국민연금이 정기주총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회사측 안건에 손을 들어준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적극적 의결권 행사를 의미하는 '스뉴어드십 코드'를 제정해 놓고, 행동은 다르게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를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규모는 2023년 말 현재 148조원이다. 이 중 직접 운용비중은 49.1%다. 

국민연금은 올해 3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도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총에서 회사측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경영권 분쟁이 있었던 한미사이언스의 주총 ▲기업은행과 사측의 갈등이 있었던 KT&G 주총 ▲행동주의 펀드와 사측의 갈등이 있었던 삼성물산금호석유화학 ▲장인화 회장의 선임 논란이 불거졌던 포스코홀딩스의 주총 등에서 국민연금은 모두 사측 입장에 찬성했다. 

이 중 한미사이언스는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이 지지를 표한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측이 패배하고,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과 차남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 측이 승리를 가져갔다.  

국민연금이 사측 안건에 반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대한항공 사내이사 조원태 선임의 건(주주권익 침해 행위에 대한 감시의무 소홀)과 이사보수한도 승인의 건(보수가 경영성과에 비해 과다) ▲포스코홀딩스 이사보수한도 승인(보수금액이 경영성과에 비해 과다) 등이었으나, 모두 국민연금의 반대 의사와는 무관하게 통과됐다.

국민연금이 올해 정기주총에서도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해 '회사 측 거수기'라는 비판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