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의 본질적 권리인 ‘신주인수권’ 보호체계 실질적으로 무력화
美, ‘완전한 공정성’ 기준 엄격 심사...지배주주의 자의적 의사결정 제어
獨 콘체른법, 구조적으로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간 이해상충 방지 역할
‘경영판단’ 법리에만 매몰...이사 충실의무 확대 상법 개정 공허한 메아리

최근 법원의 가처분 기각 결정으로 일단락된 태광산업의 자사주 교환사채(EB) 발행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기업의 자금 조달과 소액주주의 반발이라는 익숙한 구도를 띠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경영진과 일반 주주, 혹은 지배주주와 소수 주주 간의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자사주’라는 특수한 자산을 활용한 자금 조달 방식이, 상법이 보장하는 주주의 본질적 권리인 ‘신주인수권’의 보호 체계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닌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 이는 개정 상법이 천명한 ‘총주주의 이익’ 보호 의무가 사법 현장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기도 하다.
태광산업 교환사채 사건의 개요와 법원의 판단
태광산업 이사회는 지난 6월,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약27만 주(발행주식의24.4%)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3200억 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한국투자증권을 대상으로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회사 측은 이사회의 결정이 신사업 투자 자금을 확보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강화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시 태광산업은 1조 원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자사주를 활용하여 외부 자금 조달을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태광산업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을 비롯한 일부 소액주주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회사가 충분한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굳이 자사주를 활용한 교환사채 발행을 강행하는 것은 경영상 필요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자사주 소각을 통해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대신 유통 주식 수를 늘려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를 희석시키는 행위는 주주 충실의무에 위반된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자사주가 향후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나 승계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며, 교환사채 발행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다.
법원은 고심 끝에 태광산업 측의 손을 들어주며, 소액주주들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였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이사회의 자금 조달 목적 등 경영상 판단의 자율성을 존중하였다. 또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개별 주주의 이익’이 아닌 ‘전체 주주의 이익’으로 해석하며, 특정 주주의 손해 발생 가능성만으로 교환사채 발행을 금지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이사의 경영 판단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기존 법원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총주주의 이익'을 강조한 개정 상법의 취지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논란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소액주주 측은 법원의 판단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하며, 자사주 활용에 대한 규제 개선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문제의 본질은 자사주 처분과 주주권리의 실질적 침해
이번 사안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교환사채 발행이 단순한 자금 조달 행위를 넘어, ‘자사주 처분’이라는 관점에서 기존 주주의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는지에 있다.
자사주(자기주식)는 회계적으로 자산처럼 처리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주주에게 환원되었어야 할 이익잉여금을 재원으로 회사가 매입한, 잠재적으로 소각될 주식이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행위는 시장에 ‘우리 주식이 저평가되어 있으며, 향후 주주가치를 제고하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낸다. 따라서 주주들은 회사가 자사주를 소각하여 발행 주식 총수를 줄임으로써,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의1주당 가치(EPS, BPS 등)가 상승할 것이라는 정당한 기대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자사주를 소각하는 대신 교환사채의 교환 대상으로 제3자에게 넘기는 것은, 이러한 주주들의 정당한 기대 이익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이다. 이는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쓰일 것이라 믿었던 자원을, 거꾸로 자신들의 지분 가치를 희석시키는 데 사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상법이 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신주인수권 제도를 사실상 형해화한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유상증자 시, 상법은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우선적으로 인수할 권리(신주인수권)를 부여한다. 이는 증자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자신의 지분율 하락과 지배력 약화를 방어할 기회를 제공하는 핵심적인 주주권 보호 장치이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가 경영상 목적 달성을 위해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사주를 활용한 교환사채 발행은 이러한 주주 보호 장치를 교묘하게 우회한다. 기존 주주에게는 아무런 우선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사실상 신주와 다름없는 물량이 시장에 풀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존 주주는 자신의 지분 가치가 희석되는 것을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는 신주인수권의 직접적인 침해는 아닐지라도, 그 입법 취지를 몰각시키는 ‘실질적 침해’에 해당한다고 볼 소지가 충분하다.
‘총주주의 이익’ 보호라는 법 개정 취지에 맞는 해석 필요
2024년 7월 시행된 개정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총주주의 이익’으로 확대하였다. 이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 특히 지배주주 및 경영진과 일반주주 간의 이해상충 상황에서 이사가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고려해야 함을 명시한 것이다.
태광산업 사건에서 법원이 경영 판단을 존중한 것은, ‘총주주의 이익’을 여전히 ‘회사의 장기적 이익’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관점에 머무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법 개정의 취지를 축소하는 해석이다.
진정한 의미의 ‘총주주의 이익’ 보호란, 회사의 장기적 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특정 주주 집단(기존 주주)의 권리가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즉, 자금 조달의 필요성이 인정되더라도, 그 방식이 기존 주주들의 신주인수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하고 자사주 소각에 대한 정당한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이라면, 이는 ‘총주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해외에서의 시각: 미국과 독일의 경우
한국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를 미국이나 독일의 법체계 아래에서 본다면 어떠했을까? 두 국가는 자사주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규제 방식의 차이로 인해, 태광산업과 같은 이해상충 문제가 애초에 발생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강력한 사법 심사를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Duty of Loyalty) 위반을 통제한다. 만약 자사주를 활용한 거래가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경영권 방어, 승계 등)을 위한 정황이 있고 일반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이사회는 ‘경영 판단의 원칙’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기 어렵다. 법원은 해당 거래가 전체 주주에게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기준을 충족하는지를 엄격하게 심사하여 지배주주의 자의적인 의사결정을 제어한다.
반면 독일은 보다 구조적인 예방책을 택한다. 독일 주식법은 원칙적으로 자사주 취득을 금지하고, 주주총회의 특별 승인을 얻은 경우에만 발행 주식의 10% 이내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이렇게 취득한 자사주를 처분할 때도 ‘주주 평등의 원칙’과 기존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존중해야 하므로, 특정 제3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대량 매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지배회사가 종속회사의 소수주주를 보호하는 ‘콘체른법(Konzernrecht)’은 구조적으로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간의 이해상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사후적·사법적 통제에, 독일은 사전적·입법적 통제에 중점을 둠으로써 자사주가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 수단으로 남용될 소지를 차단하고 있다.
‘총주주의 이익’을 위한 진정한 길을 묻다
이번 태광산업 사건을 보며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기업의 자율성과 주주환원이라는 명분 아래, 자사주 취득을 너무 쉽게 허용해 온 것은 아닌가. 애초에 자사주 취득이 주주환원의 일환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막상 취득된 자사주는 약속처럼 소각되지 않고 시장에 다시 유통될 수 있는 ‘만능 카드’로 전락해 버렸다. 결국 주주환원이라는 명분은 실행되지 못한 채, 잠재적 매물 부담만 가중시킨 셈이다.
사실 자사주의 처분이 신주발행과 실질적으로 같다는 점은 새로운 논점이 아니다. 과거 SK 경영권 분쟁 사례나 삼성물산 경영권 분쟁사례 등 여러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자사주 처분이 주주평등의 원칙이나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침해하는지가 치열하게 다투어진 바 있다. 본 건의 핵심 역시 교환사채라는 금융 기법의 외피를 벗겨냈을 때, 그 본질이 대량의 자사주 처분을 통해 일반 주주의 권익을 침해하는지에 있다.
만약 자사주 처분의 실질이 신주발행이라면, 회사가 교환사채 발행이라는 형식을 빌려 제3자에게 대량의 자사주를 처분할 때 일반 주주에게는 속수무책으로 지분가치 희석과 주가 하락을 감내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막고, 힘없는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상법 개정을 통해 ‘총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도입한 핵심적인 취지가 아니었는가.
사법부가 ‘경영 판단’이라는 전통적 법리에만 기댄다면,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라는 상법 개정의 대의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은 우리 자본시장이 진정으로 주주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 위에 놓여 있다.
[송태원 ESG경제 칼럼니스트, 법무법인 해광 파트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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