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행동주의펀드 '디스카운트 해소' 요구, 국민연금은 '비공개 중점관리'
석유화학 부진 속 신성장동력 투자·주주가치 제고 '이중 과제' 해결 촉각
3분기 실적 설명회 분수령..."거버넌스 개선 수용하되, 장기투자 지속해야"

[ESG경제신문=김제원 기자]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캐피털이 LG화학에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한 가운데,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까지 LG화학을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하면서 LG화학이 안팎으로 이중 압박에 직면했다.
LG화학은 석유화학 부진이라는 사업적 악재와 주주가치 저평가라는 자본시장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고부가가치 석화·전지 첨단소재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강화하려면 추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당장 주주가치 저평가 해소에 나서기는 쉽지 않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LG화학 주가 껑충...팰리서캐피털 행동주의 캠페인 효과
팰리서캐피털은 10월 22일 발표자료를 통해 자신들이 LG화학 지분 1% 이상을 장기간 보유한 상위 10대 주주라고 소개하면서, 현재 LG화학의 주식시장 가치(PBR)가 기업 내재가치에 비해 74%만큼 평가 절하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팰리서의 핵심 제안은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LG화학이 보유한 LG에너지솔루션 지분 79% 중 10%를 이용해 LG화학 소수 주주들의 지분을 매입하고, 지배력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른 지분을 이용해 주가수익스와프(PRS)나 교환사채(EB) 등으로 미래 투자 재원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특히 주주가치 제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독립적 위원회 설치를 요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팰리서가 일회성 주주환원이 아닌 지속가능한 가치 창출 메커니즘 구축을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LG에너지솔루션의 시가총액은 지난 24일 기준 115조 1280억원으로 국내 기업 중 3위지만, LG화학은 28조 3075억원에 불과했다. LG화학은 배터리 사업을 물적 분할한 LG에너지솔루션의 지분 79%를 가지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 연결 매출의 50%가 LG에너지솔루션에서 나왔다.
팰리서는 이 같은 괴리를 근거로 장기적인 저평가 해소 문제를 풀어갈 장기 프로그램 시행을 촉구했다. 제임스 스미스 팰리서 설립자 겸 CIO는 "LG화학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정부의 기업 및 경제 개혁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의 'KOSPI 5000' 비전을 뒷받침하는 막중한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의 비공개 중점관리...이례적 경고
국민연금이 LG화학 지분 6.9%를 보유한 주요 주주로서 2025년 상반기 LG화학을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다. 국민연금의 최근 5년간 주주관여 대상 기업 120곳 가운데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된 사례는 단 29곳에 불과하며, 대형 상장사인 LG화학이 이 명단에 포함된 것은 '경영개선이 시급한 기업'으로 판단했음을 의미한다.
국민연금은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익 침해 가능 사안, 지속적인 반대 의결권 행사에도 개선되지 않는 사안, 기후변화·산업안전 관련 위험 관리가 필요한 사안 등을 중점관리 사안으로 두고 있다. 비공개 단계에서 개선이 없다고 판단되면 공개중점관리 기업으로 격상하거나 주주제안과 의결권 행사 등이 가능하다.
국민연금은 과거에도 LG화학과 갈등을 빚어왔다. 2020년 LG화학 배터리사업부의 물적 분할 안건에 주식 가치 희석 가능성을 우려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으며, 이후 2022년과 2025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을 이유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에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어려울 때 뺨 때리는 식으로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회원(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기관이 기업 사정을 봐가며 투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LG화학측은 "지난 상반기에 국민연금의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된 이후 다음 주주총회까지 반영 가능한 개선사항들을 도출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국민연금 실무진과 이사진 등 필요한 대면 미팅을 지속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LG화학, 석유화학 부진에 재무 압박 가중
LG화학이 신중한 접근을 보이는 근본적 이유는 석유화학 사업의 구조적 부진과 그로 인한 재무적 제약이다. 2025년 2분기 석유화학부문은 매출 4조 6962억원에 영업손실 904억원을 기록했다. 글로벌 석유화학 산업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LG화학은 기존 석유화학 사업 운영 효율화와 사업 구조 재편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LG화학은 단일 기업 기준으로 세계 최대인 연산 330만톤의 NCC(나프타분해시설) 설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NCC 연간 생산능력을 최대 370만톤 감축하는 등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석화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낮더라도 기초소재 생산 능력을 확보해야 고부가가치 소재를 개발·생산하는 과정에서 원재료 조달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석화기업이 고부가가치 소재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더라도 기초 소재를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PRS를 통한 유동성 확보 전략
LG화학은 이미 자체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활용한 자금 확보에 나선 상태다. 지난 9월 LG화학은 LG에너지솔루션 주식을 활용한 주가수익스와프(PRS) 계약을 체결해 약 2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이번 PRS 계약의 기초자산은 LG에너지솔루션 보통주 575만주로, 계약 기간은 3년이며 기준금액은 주당 34만 7500원이 적용됐다.

이 조치로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지분율은 81.84%에서 79.4%로 낮아졌다. 지배력을 80% 이하로 낮추게 된 만큼 글로벌 최저한세 부담을 피할 수 있게 됐으며, LG화학은 확보한 자금을 첨단소재, 바이오 등 신성장동력에 투입된 차입금 상환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등 기업가치 제고에 활용할 계획이다.
이는 팰리서가 제안한 "PRS나 EB 등으로 미래 투자 재원을 확보하라"는 요구를 이미 선제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 투자와 사업 재편: 미국 테네시 공장이 핵심
LG화학의 진정한 가치 창출은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서 나올 전망이다. LG화학은 지난해 11월 기업 가치 제고 계획을 내놓으며 재활용·바이오·재생에너지 등 지속가능성, 전지재료, 신약을 3대 신성장 동력으로 설정했다. 2023년 매출 기준 6조원에서 2030년 25조원 수준으로 키우고, 비중도 50%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특히 미국 테네시주 양극재 공장은 LG화학의 미래 전략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LG화학은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확보한 170만㎡ 부지에 약 2조원을 투자해 2026년 가동을 목표로 연산 6만톤 규모의 양극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는 고성능 순수 전기차(1회 충전으로 500km 주행 가능) 약 60만대분에 들어가는 규모로, 미국 최대 수준이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이 프로젝트에 10억 달러(약 1조 4000억원) 규모의 보증을 통해 금융을 지원하고 있다. 무보는 "테네시 공장 설립을 통한 현지 공급망 강화로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등 통상규범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3분기 실적 설명회 분수령..."외부 요구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LG화학 입장에서는 행동주의펀드의 이번 제안이 기업 거버넌스 강화와 주주 가치 제고라는 개정 상법의 근본 취지에 미리 대비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과거 LG에너지솔루션 물적 분할과 상장이 LG화학 소수주주들에게 손해를 초래했다는 인식을 털려면 이사회 차원에서 제품 고부가화·차별화 중심 투자로 미래 기업 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구체화하고, 배당 문제에 관해서도 주주와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종원 한국ESG평가원 대표는 "LG화학이 팰리서의 요구에 끌려다니며 수용하기보다는 선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사회 구성 개선과 같은 거버넌스 개선은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고,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반면 자사주 매입과 같은 재무적 부담이 큰 요구사항은 현재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LG화학은 주주 소통과 기업가치 제고 의지를 보이면서도 구체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다. 다만, LG그룹이 올해 들어 자사주 소각 등 기업가치 제고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어 LG화학이 기업가치 제고 전략의 향배를 어떻게 가져갈지에 이목이 쏠리는 분위기다.
이르면 10월 31일 3분기 실적 설명회(콘퍼런스 콜)에서 LG화학이 대응 방향을 내놓을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이 자리에서 LG화학이 팰리서의 제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히고, 국민연금의 우려에 어떻게 응답할지가 향후 주가와 기업가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단기 주주환원과 장기 투자의 균형점 찾아야
LG화학은 석유화학 부진이라는 사업적 도전과 주주가치 저평가라는 자본시장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했다. 팰리서캐피털의 행동주의 캠페인과 국민연금의 비공개 중점관리 지정은 LG화학에 대한 압박 수위를 한층 높였다.
하지만 행동주의 펀드의 단기적 요구를 전면 수용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기업 펀더멘털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혁신 역량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LG화학의 최적 전략은 이사회 전문성 강화와 같은 거버넌스 개선은 적극 추진하되, 현금흐름 개선과 미래 투자 재원 확보를 우선시하는 균형잡힌 접근이라고 손종원 대표는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