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실의무는 도둑질을 금지하는 ‘은율’
한국 주가 고질적 저평가 해소 지름길
최근 상법 개정을 둘러싼 논의에서 경제단체들은 “충실의무(duty of loyalty)가 도입되면 소송남발로 이사들의 의사결정이 위축되어, 미래를 위한 투자 등 기업 활동을 저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충실의무의 명문화는 공정한 자본시장 질서를 세우고, 자본시장 활성화의 근간이 될 제도적 인프라다.
충실의무는 ‘은율’, 주의의무는 ‘금율’
이사의 법적 의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충실의무(duty of loyalty)’로, 이는 지배주주나 이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나 일반주주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윤리학에서 말하는 ‘은율(Silver Rule)’, 즉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하나는 ‘주의의무(duty of care)’다. 이사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충분한 정보와 검토를 바탕으로 신중히 판단할 의무가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대하라”는 ‘금율(Golden Rule)’에 해당한다. 즉, 내가 주주라면 이사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할지를 기준 삼아야 한다는 적극적 윤리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충실의무에 적용되지 않아
경제단체들이 내세우는 가장 흔한 반론은 “충실의무가 도입되면 경영의 자율성이 침해되고 남소(濫訴)가 우려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법적 원리 자체를 혼동한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은 주의의무 위반 여부를 판단할 때만 적용되며, 충실의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충실의무는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 ‘이해상충’, ‘내부자 거래’ 등 고의적인 배임 행위를 제한하는 최소한의 규범이다. 다시 말해, 충실의무는 경영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금지하는 원칙일 뿐이다.
상식적인 의무가 아직도 법에 명시되지 않은 나라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이미 충실의무를 판례나 법률로 명문화하고 있으며, 기업은 혁신을 지속하고 자본시장은 프리미엄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상법에 충실의무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법원이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낸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검토 의견’을 보면, 대법원은 “(개정안은) 전체 주주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보호의무를 부과하려는 취지로서 그 입법 취지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 사법체계 역시 현실적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며, 충실의무의 법제화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구조 개선 없는 상속·증여세 완화는 모순
현재 재계는 상속·증여세 완화와 기업승계를 촉진하자고 주장한다. 나름 일리가 있는 요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지배권이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대한 공정성 확보, 즉 충실의무와 같은 기본적인 통제 장치의 정착이 선행되어야 한다.
충실의무 없이 승계만 자유로워지면, 사익편취가 대물림되는 한국형 봉건자본주의의 재생산만 가속화될 뿐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지름길
충실의무는 결국 단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배주주와 이사는 주주의 돈을 훔치지 마라.” 너무나 상식적인 이 한 줄을 지키기 위해, 한국 자본시장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투자자 피해와 기업가치 훼손을 감수해야 했는가.
투명한 지배구조, 공정한 자본시장, 투자자 신뢰 회복은 한국 자본주의의 체질을 바꾸는 출발점이다. 충실의무는 그 첫 단추이며, 코스피가 지금보다 2배 올라 5000 시대를 여는 헌법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봉기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