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짓는 사옥이 우리를 짓는다”
처칠과 버핏이 한국 기업에 보내는 경고

1943년, 2차 세계대전 한 가운데서 윈스턴 처칠은 폭격으로 무너진 영국 의사당 재건을 논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이후엔 그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
그 한마디는 80 여 년이 지난 오늘, 한국 기업들의 회의실에서도 되씹어 볼 만하다. 물리적 공간과 제도가 구성원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형성한다는 통찰은, 사무실 인테리어를 넘어 기업 생태계 전반에 걸친 경영 철학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2010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에서 이 문장을 다시 소환한 것도 같은 이유다. “거대하고 호화로운 본사는 제왕적 태도를 낳고, 관료적 절차는 더 큰 관료제를 낳는다.”
‘작은 본사, 큰 자율’이 만든 거인의 체질
버크셔 본사는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 외곽 블랙스톤플라자에 세들어 있다. 이 건물의 2개층을 쓰는데, 임차료는 연 27만 달러(약 3억6500만원)에 불과하다. 본사 직원은 30명 남짓이다.
버크셔가 투자한 자회사 CEO들에게 요구하는 보고서는 단 몇 장뿐이다. 그 중 하나가 “본사를 가늘게 유지하라”는 것이다. 본사가 호화로운 기업은 복잡하고 형식적인 의전과 보고체계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관료화된 조직 문화를 의미한다. 버크셔가 요구하는 단순한 본사 설계는 60년 넘게 ‘책임 있는 자율’ 문화로 자가복제되어 왔다.
반면 IBM·코닥·블록버스터처럼 한때 업계를 지배하던 기업들은 화려한 사옥과 복잡한 보고 체계를 자랑했다. 위계가 늘어날수록 아이디어는 건물의 층수를 따라 올라가기 전에 시들었고, 변화는 우아한 사무실 복도에서 발목이 잡혔다.
한국 기업들에 드리우는 ‘건물의 그림자’
한국의 기업들은 어떤가? 강남의 초고층 빌딩, CEO 전용 엘리베이터, 별도 분리된 임원 회의실과 식당 등 본사를 호화롭게 꾸미는데 열심인 기업이 많다. 한국 특유의 권위와 체면 문화의 산물이다.
건물이라는 물리적 상징이 “조직을 위한 조직”의 문화로 귀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먼저 건물의 높이 만큼이나 보고 체계가 길다. 결재선이 길수록 ‘안전한 답’만 올라온다.
직책 프리미엄에 따른 칸막이가 계급장처럼 작동하면 직원들은 고객보다 ‘윗선’부터 살핀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규칙을 늘려 방어막을 치려는 심리가 팽배해지고, 이는 관료제의 지방(脂肪)을 키운다.
기업 경영진에게 던지는 세 가지 제언
본사 공간과 상징을 냉정하게 뜯어보자. 호화로운 로비와 임원 전용 구역이 무슨 메시지를 주주와 직원에게 보내고 있는가. CEO 책상 크기와 고객 만족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되돌아봤으면 이제 변화를 위한 실행이다. 먼저 ‘제로베이스’로 프로세스를 재설계하자. 승인 단계가 두 자릿수를 넘는다면, 한 번쯤 모든 규정을 백지에서 다시 그려 봐야 한다. 절차를 대폭 줄이면 통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실제로는 책임 소재가 선명해져 오히려 사고 확률이 줄어든다.
다음으로, 보상 체계를 ‘소유자 모델’로 옮겨놓자. 직책·연차가 아니라 사업 성과와 주주 가치에 연동된 보상만이 관료주의의 사다리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임직원에게 성과 연동형 장기 인센티브 프로그램들을 과감하게 제시해 보자.
의도(設計)가 운명(文化)을 결정한다. 조직은 리더의 ‘초기 설계’를 먹고 자란다. 처음엔 편의로 만든 보고 형식 하나, 연례 행사 한 번이 시간이 흐르면 조직의 DNA가 된다. “지금 이 결정이 10년 뒤 직원들의 화법을, 고객 응대 태도를, 결국 기업 가치를 바꾼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물론 호화 사옥이나 복잡한 의전이 단번에 기업을 망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것들이 경직성과 사각지대를 만들어 혁신의 물꼬를 틀어막는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언젠가 기업을 ‘형식의 포로’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결론이다. “사옥 대신 문화에 투자하자.” 한국 기업들은 이제 성장에서 성숙으로 넘어가는 기로에 서 있다. 외형적 권위보다 내실 있는 문화가 기업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다. 건물·제도·상징이 곧 기업 문화를 향한 ‘선언문’임을 잊지 말자.
처칠의 한 문장은 전쟁 중 의사당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의 이사회·경영진이 자신과 후대의 일터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자 경고다.
“우리가 짓는 사옥이 우리를 짓는다.” 처칠의 이 말을 한국 기업들이 미래 경쟁력을 가르는 설계도에 반영하길 바란다.
[김봉기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