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등 일부 회원국 격렬한 반대에도 채택 가능성 커
초안 채택되면 소형 원전 중심 '원자력 르네상스' 개막 전망도

[ESG경제=이신형기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원자력 발전과 천연가스 발전을 포함시킨 녹색산업 분류체계(택소노미) 초안을 공개한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이 강하게 반대하는 등 후폭풍이 가시지 않고 있다.
하지만 블룸버그뉴스와 로이터통신 등의 보도에 따르면 이 초안이 부결되려면 27개 회원국 중 20개 회원국의 반대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일부 회원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결국은 이 초안이 채택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EU 집행위는 이달 12일까지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을 마치고 이달 말까지 최종안을 도출해 채택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최종안이 EU 집행위에서 채택되면 최장 6개월간 유럽 의회와 각국 정부의 검토 기간을 거쳐 시행된다.
EU 집행위원회가 마련한 EU 택소노미 초안에 따르면 EU는 방사능 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site)와 보관 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fund)과 계획(plan)을 갖추는 조건을 충족하는 원전 사업에 2045년까지 “녹색”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
EU 집행위원회는 또 kWh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70g 미만이고 석탄 발전 등 천연가스 발전보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발전소를 대체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천연가스 발전사업에 2030년까지 “녹색” 지위를 부여한다. “녹색” 지위를 인정받은 천연가스 발전사업은 2036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이나 저탄소 가스 발전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갖춰야 한다.
유럽 각국, 정치적 대립 격화
블룸버그뉴스는 4일 EU가 일부 원전과 천연가스 사업에 “녹색” 지위를 부여한 것은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해결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의 녹색당 소속 정치인들은 EU 초안이 택소노미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재생에너지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레 게베슬러 기후에너지장관은 EU 집행위에 초안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EU 집행위가 이 초안을 고수한다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원전을 택소노미에 포함한 것에 반대하고 있으나, 천연가스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와 다른 입장을 보인다. 독일은 작년 말 3개 원전을 폐쇄하고 올해 안에 현재 가동 중인 나머지 3개 원전까지 모두 폐쇄해 탈원전을 완성할 계획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달 말까지 입장 차를 좁혀 EU 집행위의 택소노미 초안에 반대하는 공동 대응에 나설 전망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의회의 다수 의원이 이 초안이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할 것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유럽 의회의 EPP(European People’s Party) 소속 에스테르 드 랑게 의원은 블룸버그 기자에게 에너지 전환의 중간 단계에서 가스를 활용함으로써 “석탄 발전에서 벗어나 빠르게 CO2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PP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원자력 발전도 적절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원전은 정치적으로 천연가스보다 더 민감한 문제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룩셈부르크와 포르투갈, 덴마크도 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반면에 프랑스와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은 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 세계 금융시장 투자자가 주목
EU 택소노미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민간 투자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 세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카 린틸라 필란드 경제장관은 현재 진행 중인 녹색 전환은 “현재 글로벌 투자를 좌지우지 하고 있으나, 현실적이고 유럽의 경쟁력을 파괴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EU 택소노미에 원전과 천연가스 발전이 포함되면 금융기관과 연기금이 원전이나 천연가스 발전 사업자에 투자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 보도에 따르면 크레딧 스위스의 마르시아 드류 ESG 투자 책임자는 “원전은 ESG 친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됐으나, EU의 이번 결정으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달러 투자 자금이 이 분야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로펌 헌튼 앤드류스 크루스(Hunton andrews Kruth)의 게오르그 보로바스 원자력 에너지 책임자는 "탄소 배출량 감축 수단으로 원전에 대한 관심과 선호가 점점 커질 것"이라며 “모든 나라는 아니지만 여러 나라에서 원자력 르네상스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규모 원전이 아닌 소형 모듈 원자로(SMR)가 각광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원전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만만치 않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 에너진 전환 관련 자문기관인 클럽 오브 로마(Club of Rome)의 산드린 딕슨 디클레베 공동 회장은 원전과 천연가스 발전 모두 “녹색”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클럽 오브 로마는 원자력 발전은 방사능 폐기물과 폐기물 보관의 안전 문제 등을 고려할 때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벨기에의 싱크탱크 E3G의 지속가능 금융 전문가인 츠베텔리나 쿠즈마노 정책 자문관은 원전과 천연가스 발전을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는 것은 “녹색이 아닌 것을 녹색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EU 택소노미에 여러 나라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며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닥을 향한 경쟁”은 과도한 규제 완화에 따른 경쟁으로 편익이 감소하는 현상을 뜻한다.
EU가 제시한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원자력 발전과 천연가스 발전의 경제성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유진투자증권의 한병화 애널리스트는 "핵 폐기물의 안전한 처리와 환경 오염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주목한다. 그는 “현재 유럽전역에 고준위 영구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있는 국가는 핀란드뿐”이라며 “여러 국가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국민들과의 합의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원전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허용 조건은 “독소 조항”이라고 말했다.
그는 “천연가스 발전은 더 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의 지난해 기준 천연가스 발전소의 탄소배출량은 429g/kWh”라며 “추가적인 설비 없이는 EU에서 천연가스 발전소가 신설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