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ESG 펀드의 14%, 러 국영 에너지 기업들과 국채에 투자 중
"러와 러 기업에 투자하면 안 된다" vs. "윤리투자 아니어서 괜찮다" 충돌

[ESG경제=이진원 기자] 사람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투자한다고 광고하는 ESG 펀드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을 감행하며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러시아 기업 주식이나 자산에 투자하는 게 정당하냐를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논란은 ESG 투자가 말 그대로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같은 기업의 비재무적인 리스크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반드시 '윤리적인 투자'여야 하느냐는논란으로도 옮겨붙고 있다.
6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블룸버그 등 복수의 외신에 따르면 글로벌 ESG 펀드들은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인 가즈프롬(Gazprom)과 로즈네프트(Rosneft)는 물론이고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Sberbank)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독재 통치자금으로 쓰이는 러시아 국채에도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ESG 투자는 실패했다" 커지는 자성론
ESG 전문가인 폴 클레멘츠-헌트는 이를 두고 “ESG 투자는 실패했다”면서 “ESG가 비효율적으로 남용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투자자들이 기업 리스크뿐만 아니라 경제 및 정치 시스템 전반의 리스크를 평가해야 하지만 쉽게 돈을 버는 데 눈이 멀어 연관된 리스크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예상하지 않았던 ESG 투자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가령 모닝스타 연구원들은 전 세계 ESG 펀드의 14%가 전쟁 전부터 이미 러시아 자산에 투자해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나타식스 투자운용 산하 ESG 투자회사인 미로바(Mirova)의 필립 자우아티 CEO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한 가장 중요한 ESG 이슈 중 하나”라면서 “이것은 에너지 및 인권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며, 우리가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묻게 해주는 이슈”라고 강조했다.
"ESG 펀드는 윤리적 펀드가 아니다" 주장도
하지만 ESG 투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전문가들 중 일부는 ESG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SG 데이터로 작업하고 분석하는 대기업들은 ESG를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같은 기업의 비재무적인 리스크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스크리닝 도구’ 정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모닝스타의 글로벌 지속가능성 연구 수석인 호텐스 비오이는 “여전히 지속가능성과 윤리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지속가능한 ESG 펀드들은 윤리적 펀드들과는 엄연히 다르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ESG 펀드들은 전통 무기와 화석연료 생산업체를 포함해서 광범위한 기업들에 투자해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최대 ESG 상장지수펀드(ETF)인 블랙록의 아이셰어스 ESG 어웨어 MSCI USA 펀드는 미국 우주항공 방위산업기업인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와 정유회사인 엑슨 모빌 같은 기업들의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비오이는 따라서 "ESG펀드 운용사들도 러시아 자산 보유 유무와 상관없이 다른 운용사들처럼 현재의 투자 여건을 파악하고, 전쟁이 미칠 광범위한 영향과 그것이 자신들이 운용 중인 포트폴리오에 미칠 영향에 대해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착한' 러시아 기업 투자도 문제?
또 다른 일각에서는 러시아 자산 매각 시 애꿎은 우량자산 손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푸틴에 맞서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기술기업들에 대한 투자도 포기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회적 정의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ETF를 운용하는 아다시나 소셜 캐피탈의 창업자인 라이첼 로바시오티는 “어떤 기업이 러시아 같은 독제 정권의 꼭두각시가 아닌 이상 기업과 그 기업이 속한 국가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우리는 본사가 소재한 국가가 하는 행동을 갖고서 기업을 벌주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가장 오래된 사회적 책임 투자기업 중 하나인 보스턴 커먼 자산운용은 러시아 검색엔진인 얀덱스(Yandex)가 러시아의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해 투자해오다가 지난달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
얀덱스의 마케팅 본부장인 케빈 하트는 “얀덱스는 인권과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수칙을 채택해왔다”라고 말했다.
ESG 투자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
전문가들은 지금이 ESG 투자자들이 ESG 투자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미로바의 자우아티는 “우리는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기업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해야 한다”며 “이는 앞으로 러시아 외 다른 독재정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기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로바는 이런 고민 끝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자산도 포트폴리오에서 배제시켰다.
조사회사인 서스테이너블 마켓 스트래티지의 상무이사인 펠릭스 보우드롤트는 "2018년부터 대(對)러시아 투자를 자제해줄 것을 고객들에게 당부해왔으며, 지금은 대중국 투자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자로서 기업뿐만 아니라 그 기업이 활동하는 주변 환경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라면서 “ESG 관점에서는 중국에도 투자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