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구현모 사장 연임 반대의사 강하게 표명
시민단체도 동조...현대차 등 주요주주 고민할 듯
구 사장 해외 IR 기관투자자 설득 등 정면돌파 준비

[ESG경제=김도산 기자] 국내 우량 대기업과 금융그룹 중 오너가 없는 주식 완전 분산 기업의 1대 주주는 대부분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약 270개 상장기업의 주식을 5% 이상 소유해 1~2대 주주의 지위에 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정부가 민간기업 지배권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는 연금사회주의 논란 때문에 경영권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의결권 행사는 자제해 왔다. 의결권 행사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한 이후에도 주주가치 훼손이 분명한 경우에만 기업 지배권에 개입하는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국민연금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기업 CEO(최고경영자)가 자기 사람들(사외이사)로 이사회를 꾸린 뒤 이사회 추천을 통해 연임, 3연임을 하는 관행을 확실히 차단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첫 케이스로 올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국민연금이 적극 개입하고 나선 게 KT 구현모 사장(대표이사)의 연임 건이다. 그의 연임 문제는 KT 안의 2개 노조가 찬반으로 갈려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까지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국민연금, “셀프연임, 황제연임 안된다”
윤 정부 들어 국민연금은 소유 분산 기업들에 대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공기업에서 전환해 오너가 없는 KT와 포스코, KT&G, 그리고 은행계 금융지주회사 등이 주된 표적이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주로 재벌 총수에 초점이 맞춰져 왔는데 이제 소유 분산 기업의 합리적 지배구조가 어떤 것인지도 고민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원주 신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지난달 27일 취임 일성으로 “KT나 포스코와 같은 소유 분산 기업들이 CEO 선임을 투명한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야 셀프연임, 황제연임 우려가 해소되고 주주가치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기회에 KT가 좋은 관행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며 구현모 사장의 연임 건을 적시했다.
그럼에도 KT의 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는 바로 이튿날 “구 사장의 연임이 적격하다”며 3월 주총 안건으로 올릴 최종 CEO 후보로 확정했다. 그러자 국민연금 서 본부장은 작심한 듯 “취임 인사 과정에서 밝힌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앞으로 의결권 행사 등에 이런 사항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 사장 연임에 사실상 반대표를 던질 수 있음을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재계와 여의도 증권가는 해석한다.
盧정부 출신 이강철 KT 사외이사 사퇴
국민연금이 KT 지배권에 적극 개입하는 것과 관련해 주목을 끈 것은 KT의 이사회 구성이다.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던 이강철씨와 역시 참여정부 청와대의 경제정책수석을 지낸 김대유씨가 KT의 현 사외이사다.
현 정부와 국민연금은 7명의 사외이사 중 2명이 과거 민주당 정권 요직에 있었던 인물이고, 더구나 이들은 정보통신 분야 전문가도 아니라는 점을 문제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민연금이 강조한 “공정한 CEO 추천 절차”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의 빌미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현 정부가 구 사장을 민주당 성향의 인물로 지목하고 연임을 저지하기로 마음먹은 주된 이유라고 재계는 해석한다.
이처럼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자 이강철 사외이사는 5일 사퇴 의사를 전격 표명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그가 구 사장의 연임 추천에 한표를 던진 뒤 물러나는 것이라 큰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구 사장은 지난 2일 윤 대통령이 참석한 대한상의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하지 않아 현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가 확인된 것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2~3대 주주 현대차·신한은행 ‘깊은 고민’
구 사장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최종 결론은 3월 예정된 KT 주총에서 나게 된다. 재계에선 표 대결이 펼쳐질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점친다. KT의 주주구성을 보면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지분율 10.35%)에 뒤이어 현대자동차그룹(7.79%)와 신한은행(5.58%)이 자리한다. 나머지는 국내 기관과 개인, 외국인투자자 등으로 분산돼 있다. 외국인 지분율은 총 43% 선이다.
현대차그룹과 신한은행은 KT와 자사주를 맞바꾸며 미래 사업을 위한 전략적 제휴를 맺어 2~3대 주주 자리에 올랐다. KT 구 사장 연임 건이 표대결로 갈 경우 현대차와 신한은행이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들이 어느 편에 서게될 것이냐는 점이다. 기존의 사업 제휴 등 KT와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구 사장 측에 유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현대차와 신한금융 주식 또한 10% 안팎씩 보유한 대주주여서 두 회사가 국민연금에 맞서기는 불편한 측면이 있다. 더구나 국민연금에 맞서면 결과적으로 현 정부의 뜻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는 점도 부담이다.
한편 구 사장은 43%의 지분을 갖고 있는 외국인투자자들은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주주총회 전에 몸소 해외 IR(투자설명회)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과 참여연대까지 가세
구 사장의 연임 문제에 대해 KT의 새 노조와 민주노총, 참여연대, 재벌개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5일 공동성명을 내고 "구 사장의 연임을 반대하며 국민연금이 3월 주총에서 KT 등 지배구조 문제기업에 대해 단순 의결권행사를 넘어 주주제안 등 적극적 주주활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성명은 "구 사장은 과거 KT의 '상품권 깡' 비자금 조성 및 국회의원 정치자금 불법 후원에 가담했으며 이로 인해 KT가 지난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과징금 630만달러(약 78억원)를 부과받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기업가치를 훼손하고 주주 권익을 침해한 대표이사를 연임시키는 KT 이사회의 결정은 이사의 선관주의·충실의무를 위반한 것이며 국민연금은 불투명한 지배구조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를 반대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구 사장, 정면돌파할지 타협할지 주목
야당 성향의 시민단체와 노조의 지지까지 얻은 국민연금은 구 사장 연임 반대에 직진할 것으로 보인다. 관심은 구 사장의 대응이다. 국민연금에 대들어 사실상 현 정부와 맞설 것인가, 아니면 무난한 출구전략을 찾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현 상황에선 구 사장이 정면돌파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재계는 내다본다. 구 사장이 2월 중 해외 기관투자자들을 몸소 만나는 일정을 강행하면 끝까지 간다는 의지가 확인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구 사장이 KT에서 연구원부터 시작한 내부 출신으로 누구보다 KT의 미래를 걱정하고, 더구나 재임 중 기업가치 상승과 사업구조 개편 등 큰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막판에 다른 선택을 할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자신이 30여 년간 몸담은 조직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적잖은 성과를 낸 CEO로 기록되기 위해 명예로운 용퇴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