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허무에 빠지면 ESG 실행력 잃어
철저히 공허해지고, 고독해지고, 소외되자

ESG는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라는 세 가지 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함께 실천해야 할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자리가 있다. 그것을 이끄는 CEO의 내면이다.
리더가 허무에 빠지면 ESG는 실행력을 잃는다. 내면이 고갈된 리더는 조직의 방향성과 진정성마저 흔들리게 한다. ESG는 전략이 아닌 문화이며, 그 출발점은 CEO의 마음가짐이다. 허무를 직면하고 내면의 중심을 회복할 때, 비로소 ESG는 기업의 일상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의 말은 오늘날의 리더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웃으며 즐겁게 사는데, 나는 혼자 텅 빈 가슴으로 고요하다. 욕망은 낌새조차 안 보이고, 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갈 곳이 없다... 모두가 쓸모 있는데, 나만 혼자 어리숙하고 완고하다(도덕경 20장).”
이 구절은 철학자의 고백이자, 성공한 어느 CEO의 심경과도 닮았다. 그는 40년 동안 쉼 없이 달려 건실한 중소기업을 일궈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 자녀들도 독립했고 본인도 사업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문득문득 반복되는 상념이 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마음을 맴돈다.
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세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첫째, 공허감이다. 나른하고, 계속 피곤하다. 젊어 일할 때는 힘들어도 에너지와 열정이 넘쳤다. 지금은 이뤄야 할 목표가 희미하다. 각종 연구모임과 조찬회도 시들해졌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매번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들 즐겁고 똑똑해 보이는데, 나만 울적하고 어리숙하게 느껴진다. 혹시 우울증일까. 무언가 잃어버린 듯, 가슴이 텅 빈 느낌이다.
둘째, 고독감이다. 아내와 도란도란 대화하던 기억이 아득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집안일에는 무관심했고, 회사 이야기는 전달해도 이해받지 못하니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부부 사이의 공통 주제는 사라졌다.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조차 어렵다. 아내는 이제 골프와 동창 모임 등으로 즐겁게 살아가는데, 함께 있어도 외롭다. 남은 세월이 더 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셋째, 소외감이다. 아이들과 한없이 웃던 기억은 사라졌다. 어느새 다 커버려 아버지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 간섭하지 말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필요한 이야기는 어머니와 나누고, 꼭 필요한 말은 메일로 전한다. 대화가 줄자 관계도 멀어진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길(道)을 가고 있다. 예고도 없고 연습도 없이 가는 여정이다. 어떻게 들어섰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길을 가고 있다는 자각이 떠오른다. 10대에 느끼기도 하고, 30대에 알아차리기도 하며,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인생길은 누구나 처음 가는 길이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단 한 번의 여정이다. 도(道)는 젊어서 알아도 이르지 않고, 늙어서 깨달아도 늦지 않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를 찾는 행운은 누구에게 올까?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 어느 날, 비행기 안에서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구름 사이로 펼쳐진 작은 세상에서 논다는 생각이 든다. 장난감 같은 집과 길과 차를 보며, 문득 보잘것없다는 느낌에 잠긴다. 어깨에 힘주고 살던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이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고, 경쟁에서 빠져나와 무욕(無慾)의 공간에 숨고 싶다. 이렇게 자신이 미물임을 자각할 때, 무한한 공간(空虛)을 누비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기(Self)가 되는 출구에 서게 된 것이다.
내가 되는 행운은 누구에게 올까?
크게 실패한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공원에 누워 묵묵히 하늘에 뜬 구름을 바라본다. 거대한 어항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흘러가는 구름을 온몸으로 느낄 때, 평화가 찾아온다. 언제나 푸른 잔디처럼 살아 있는 몸을 확인할 때, 다시 힘이 솟는다. 움츠린 자신이 싱겁게 느껴진다. 잘났건 못났건 “나는 나”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실패가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자각할 때, 무한한 허공(空虛)을 헤엄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자기(Self)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그것(본능)이 있던 곳에 자아가 있다.” 인생 전반기는 자아가 자기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에 적응하고 의식 기능을 개발하는 시기다. 인생 후반기는 자아가 자기에 접근해 가는 시기다. 자기실현은 소외된 열등 기능을 개발하고, 무의식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자기가 자신의 주체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Self)는 인격의 중심이자 전체다. 부처나 예수와 같은 상징으로 간접 인식되기도 한다. 자기실현은 끝없는 여정이다. 깨달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정진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것(욕망)이 있던 곳에 자기가 있다.” 옛날에 한 아버지가 아들을 공부시키려 친구에게 보냈다. 아들은 친구 밑에서 20년간 수학, 철학, 정치학, 천문학 등을 배워 최고가 되었다. 그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자신만만한 아들을 보고 화를 내며 그날로 내쫓고 말했다. “그것을 배워 와라.”
아들은 낙담해 다시 스승에게 돌아가 “그것”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스승은 소 한 마리를 주며, “이 소가 100마리가 될 때까지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20년이 흘렀고, 스승조차 아들을 잊었다. 어느 날, 백발이 된 아들이 소 100마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기 101번째의 소를 봐라.”
허무에 빠진 CEO를 위한 처방은 무엇일까?
첫째, 철저히 공허해지자. “공허해 본 자만이 진리에 도달한다.” 그동안 내가 추구한 가치는 무엇인가? 앞으로 내가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성공이고, 무엇을 위한 행복인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참 나(Self)를 찾는 것이다. 머리(知)를 비우자. 생(生)이 본래 공(空)임을 깨닫자. 가슴(情)을 비우자. 뼈와 살을 가진 인연 맺은 이들을 뜨겁게 사랑하자. 장(意)을 비우자. 내 한 몸에 매이지 말고, 만물과 연결됨을 느끼자. “생로병사, 모든 게 다 공(空)이다.”
둘째, 철저히 고독해지자. “고독해 본 자만이 진실에 도달한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앞으로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채우러 온 것도, 비우러 온 것도 아닌, 배우러 온 것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 나 사랑을 실천하자. 자기 사랑은 모든 사랑의 출발이다. 너 사랑을 실천하자. 임 사랑은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이다. 남 사랑을 실천하자. 이웃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다. “희로애락, 모든 게 다 고(苦)다.”
셋째, 철저히 소외되자. “소외돼 본 자만이 자기(Self)를 만날 수 있다.” 소외는 우리를 보다 큰 것에 머물게 한다. 사회보다는 자연이 크고, 생활보다는 삶이 크며, 성(性)보다는 사랑이 크다. 일생을 산간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바닷가에 서서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는 심경이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자. 사회의 틀에 갇혀 왜곡된 나를 찾자. 지식으로부터 소외되자. 지식의 권위에 눌려 잃어버린 나를 되찾자. 언어로부터 소외되자.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잊힌 나를 만나자. “속지 않는 자만이 방황한다.”
[이후경 ESG경제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