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10조원 사회공헌안 수용 거부 발언
"3년후 금송아지 아닌 당장의 물 한 모금 필요"

[ESG경제=김도산 기자] 정부와 은행권의 충돌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 공공재” 발언에 이어, 대통령의 심복으로 통하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의 약탈적 영업”을 운위하며 강도높은 비판에 나섰다.
정부는 은행권이 내놓은 3년간 10조원 규모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사실상 거부했다. 이 원장은 "3년 후 금 송아지 말고 당장의 물 한 모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은행연합회와 은행계 금융지주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주인 없는 회사 거버넌스 개선’ 발언에 이은 이번 은행 압박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사전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금융권은 드러내고 있다. 일단 ‘복지부동’하며 새로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선진국 사례를 볼 때 기업 거버넌스라는 것이 결국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협력과 충돌, 그리고 타협의 산물“이라며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경제권력에 우호적이었던 거버넌스 환경이 이제 저성장과 고물가 시대를 맞아 정치권력 쪽으로 급속히 기우는 양상‘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윤 대통령 복심의 고강도 발언
이복현 금감원장은 17일 "은행이 약탈적이라고 볼 수 있는 방식의 영업을 하고 있다"며 "주된 배경에는 독과점 시장 환경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 진단 및 향후 과제' 세미나가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작심한 듯 강성 발언을 쏟아냈다.
이 원장은 은행권이 최근 내놓은 10조원 규모의 취약계층 지원책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갔는데 본질과 어긋난 측면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3년 후 금 송아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손에 물 한 모금을 달라는 니즈가 있다"고 했다.
또한 "은행들은 금융 취약층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지점 수를 줄인다든가 고용을 줄여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수익을 높이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며 “금리 상승기에 소비자들이 큰 금리 부담을 겪는 와중에서도 은행들은 수십조 이익이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약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비용 절감과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들이 있었고 그게 지금 정점에 와 있다"며 "그 주된 배경엔 독과점적 시장 환경이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은행권 과점 체제 개선 방향을 묻자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자는 게 기본적인 스탠스"라며 "새로운 (사업자의) 시장 진입이 필요하다면 그것까지 다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은행 인가를 용도나 목적에 따라 세분화해 소상공인 전문은행이나 중소기업 전문은행 등을 유도하는 방안, 인터넷 전문은행을 추가 허용하는 방안, 핀테크 업체의 금융업 진출 확대 방안 등이 벌써부터 거론되고 있다..
이 원장은 “은행의 건전성과 경쟁력 사이에서 조화를 찾을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은행권·학계·법조계·소비자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오는 23일부터 가동한다.
윤 대통령, '돈잔치' 지적 이어 '과점 폐해' 질타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제13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은행권을 강하게 질타했다. "금융·통신 분야는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고 정부 특허에 의해 과점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며 '예대마진' 축소와 취약 대출자 보호를 주문했다.
그는 또 "우리 은행 산업에 과점 폐해가 크다"며 "은행은 수익이 좋은 시기에 충당금을 충분히 쌓고 이를 통해 어려운 시기에 기업과 국민에게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앞서 지난 13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참모진과의 회의에서는 은행권의 성과급과 명퇴금에 대해 '돈 잔치'란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은행권에선 정부 지분이 없는 민간 기업에서 자율적인 경영 판단과 의사 과정을 거쳐 결정한 사항을 두고 정부가 과도한 개입을 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공개적으로 정면 대응하기 힘들어 속앓이하는 분위기다.
한편 은행권이 이번 사태를 자초했다는 자성론도 나온다. 지난해 한국은행의 잇단 기준금리 인상 과정에서 은행권은 예금 등 수신금리보다 대출금리 인상 폭을 더 높여 소비자 부담을 키운 게 사실이다. 여기에 연초 코로나 사태 종식에 따른 영업시간 복원 문제에 있어서도 은행권은 노조 핑계로 미적거리다 화를 키웠다. 결국 은행권은 뒤늦게 10조원 사회공헌 약속으로 수습에 나섰지만 정부와 여론의 싸늘한 반응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인 모습이다.
정부 책임은 없나
그러나 은행권의 독과점 구조와 예대마진 확대, 과도한 성과급 잔치 등도 따지고 보면 정부가 금융정책을 잘못 집행한 결과물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의 끊임없는 합병과 금융지주사 설립을 유도해 사실상 지금의 은행 독과점체제를 형성시킨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커지는 예대마진과 금융지주사 회장 셀프연임, 과도한 성과급 문제 등도 은행업이 어쩔 수 없이 정부의 라이선스에 기반한 규제산업이란 점에서 정부가 얼마든지 사전 개입하여 조정할 수단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은행 탓만 할 수 있느냐고 금융 전문가들은 비판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수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당연한 작동 원리다. 정부가 멍석을 그렇게 깔아줘 놓고는 거기에 장단을 맞춘 시장 참여자들에게만 책임을 모두 돌리는 건 무책임한 처사라는 비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정부 여당이 고금리와 난방비, 통신비 등으로 고통받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릴 ‘희생양’을 찾는 게 아니냐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배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