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ESG 평가등급 잘받기 경쟁
형식 지표 치우친 평가 해외선 안 통해

2023년 6월 현재, 우리나라 ESG 업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벤트는 단언코 한국ESG기준원(KCGS)의 ‘ESG 평가설명회’다. KCGS는 검증받은 지속가능성보고서를 이달 말까지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한다고 3월 1차 설명회에서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의 반발에 부딪쳐 지난달 10일 열린 2차 설명회에서 7월로 연기했다. 겨우 한 달 차이가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만들어 본 실무자들은 알 것이다. 한 달을 앞당기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를.
ESG 뭐 있어, 평가 잘 받으면 되지
ESG나 지속가능경영 컨설팅을 해달라고 해서 기업의 담당 임원이나 실무자들을 만나 지속가능경영에 대해 설명을 조금 하려고 하면 처음엔 속내를 드러내지 않다가 5분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센터장님, 저희 회사는 지금 지속가능경영을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준비되는대로 차근차근 하려고 하고요. 저희가 원하는 것은 작년에 KCGS 평가가 C 등급이었거든요. 올해는 B 등급으로 올리고 싶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고 (컨설팅 비용이) 얼마 정도면 될까요?"
이런 말이 나에겐 이렇게 들린다.
"저희 아들 성적이 지금 수도권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정도가 안됩니다. 차근차근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구요. 속성으로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요?"
ESG 실무자 교육을 하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어려움이 회사에서 ESG, 지속가능경영을 평가 대응 중심으로 하라고 지시한다는 것이다. 뭔가 진짜 지속가능경영을 해보려고 기획안을 올리면 담당 임원이나 대표는 "이렇게 장기적이고 돈이 들어가는 일은 내가 다른 자리 간 다음에, 내가 그만 둔 다음에 하라" 고 한단다. 나 또한 대기업 CSR팀장일 때 담당 임원에게 들었던 소리다.
ESG평가에 대응하다 '허송세월'
EU를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 열심히 진출하고 있는 K기업의 ESG팀장을 며칠 전 만났다. 그의 말이다.
"ESG평가에 대응하느라 시간과 컨설팅 비용을 허비한 것이 매우 후회되요. 2년 전에 센터장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ESG 데이터 체계를 구축하고 자회사와 협력사들과 공동으로 ESG 협력체계를 제대로 만들었으면 지금 평가도 잘 받고 유럽 기업들의 요구사항에 그리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게 됐을 텐데요. "
그는 2년 전 회사 경영진에게 ESG 데이터 체계와 자회사 및 협력사와 함께하는 지속가능경영 실행체계 구축의 시급성을 보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담당 임원은 그것보다 당장 ESG평가 등급을 올려주겠다는 컨설팅사의 유혹(?)에 넘어가 수억원을 주고 지속가능성보고서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껍데기뿐인 보고서였지만 그 덕분에 재작년 KCGS 평가 등급 C였던 것이 작년 B로 올랐다.
"C에서 B 등급이 되었다고 우리 회사 지속가능경영이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이제는 B등급 받았으니 ESG팀은 지금 그대로만 유지하라고 하죠. A등급은 회사에서 바라지도 않고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EU쪽에서 원하는 공급망 관리 등 요구 사항에 대응할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거예요. EU쪽 요구 사항을 상무님께 보고했더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보고하면 어쩌냐, 진작에 이게 더 중요하다고 했어야지' 라고 역정을 내는 거예요."
형식 치우친 ESG평가는 속빈 강정
ESG평가는 정말 중요하다. 어떤 기업이 지구환경과 사회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도 높일 수 있는가 정확히 측정해야 그 기업에 대한 투자 결정을 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의 ESG평가 방식으로 과연 지속가능경영을 진정성있게 잘 실행하는 기업을 제대로 골라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의 평가방식으론 겉 껍데기만 볼 수 있을 뿐 속 알맹이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ESG기준원을 비롯해 MSCI, DJSI 평가도 형식에 치우친 면이 많다. 여기서 형식이라 함은 지속가능경영과 ESG에 관련된 글로벌 가이드라인들의 요구 사항을 얼마나 '형식적'으로 잘 갖추었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ESG평가를 받기 위해 회사 내에 실제 있지 않거나 작동하지도 않는 원칙, 규정과 행동강령, 위원회를 만들고 그것이 실제 작동하고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고서를 꾸며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는 곳이 바로 ESG 컨설팅회사들이다.
한국ESG기준원이나 MSCI, DJSI 역시 이런 껍데기 형식 안에 실제 알맹이가 있는지, 그리고 실제 경영현장에서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지를 파악해 그것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도 평가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봐야 한다.
지속가능성보고서 3자 검증도 형식 치중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발간한 지속가능성보고서는 제3자 검증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 또한 내용 검증이 아니라 형식 검증에 불과하다. 기업 스스로 발간한 보고서를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더구나 그 보고서의 대부분은 컨설팅사의 코치 또는 대필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컨설팅과 보고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ESG평가의 등급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답답한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기업이 ESG평가에서 A등급을 받았다고 해서 B등급을 받은 회사보다 지속가능경영을 더 잘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단지 지속가능경영의 형식을 B등급 받은 회사보다 A등급 받은 회사가 조금 더 형식을 잘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다.
물론 평가 기간 환경, 사회, 거버넌스 측면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법적 제재를 받는 등 공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기업이 네거티브 평가 방식에 의해 ESG 등급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별 이슈가 없는 기업들끼리 상대 평가를 할 때는 보고서 등 겉으로 공개된 자료만 가지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식에 치우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기업 내부 사정도 알 수 없고, 지속가능성 보고서의 내용이나 데이터도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무얼 가지고 ESG 평가를 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확인할 수 있는 평가를 해야 한다고. 그렇게 되려면 지금처럼 수십, 수백 개의 평가지표를 줄줄이 늘어놓고 얼마나 많은 평가지표에 형식적으로 충족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환경이나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검증가능한 핵심 숫자만 몇 가지 추려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산업 내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절대 평가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즉, 평가지표의 숫자를 늘리고 그 지표 형식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애쓰지 말고, 정말 중요하고 검증 가능한, 그래서 기업이 환경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반드시 책임져야할 단 몇 개의 확실한 숫자를 평가를 해야한다.
온실가스와 폐기물을 많이 배출하고 토양과 물을 오염시키는 회사, 노동자와 협력업체에게 고통을 주는 회사, 제3세계 공급망에서 아동노동과 노예노동이 일어나고 있는 회사가 ESG 평가기관들이 요구하는 형식상 지표들을 잘 갖춰놓았다고 A 등급을 받는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ESG평가는 학업성적보다 인성과 태도 평가에 더 가깝다. 학업 성적이 상위 1%라고 해서 인성과 태도 또한 상위 1%인 것은 아니다. 지금의 ESG평가는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유승권 이노소셜랩 ESG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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