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에 재정적 안정 못지 않게 중요한 친구 네트워크 유지해야
나이 들면 자기중심적 성향 커져...친구관계에 각별한 노력 필요

지난해 연말 대기업 임원 인사 때 옷을 벗은 김모(61)씨. 높은 연봉에 번듯한 지위까지 남부러울 게 없어 퇴직해도 별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받은 월급은 아이들 교육비와 노부모 병치레로 써 저축 한번 제대로 못했다.
김 씨가 어렸을 때 소녀 가장 역할을 했던 누이가 아직 미혼이라 생활비도 대줘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는 자녀가 둘 있지만 결혼에 관심이 없다. 결혼을 한다 해도 큰 일이다. 전셋집이라도 마련해 주려면 살고 있는 집을 줄이거나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요즘은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은퇴자에게 친구는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줄 소중한 자산이라고 하지만 김 씨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여전히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가장 큰 이유다. 모임에서 강남에 아파트 한채 샀다, 금융자산을 굴려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동안 뭐했지’라며 자조에 빠진다. 아들 결혼 때 전셋집을 마련해줬다는 자랑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싶은 심정이다.
아내에게 사정해 겨우 밥값을 얻어 나왔는데, 별 생각 없이 떠드는 친구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결국 모임 참석을 꺼리게 되고, 같은 처지의 퇴직자들끼리 모여 동병상련을 나누게 된다. 결국 친구들과의 교류도 뜸해지면서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간다.
정으로 통하는 사회
우리나라는 정으로 통하는 사회다. 친구와의 관계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돈이 없어도 친구가 많으면 마음 만큼은 부자다. 친구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는 은퇴 전이나 후 모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친구는 자아가치를 재확인하거나 자아검증의 수단에도 기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이 있거나 고독할 때 가족보다 친구를 찾는 경향이 강하다.
노후는 삶의 변화와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시기다. 가족 구성이나 건강 상태 등이 변화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외로움이나 불안감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친구는 이러한 감정적인 지지와 연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도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큰 위로가 된다. 또 친구들과 함께하는 활동은 에너지를 공유하고 새로운 경험을 나누게 해준다. 함께 여행하거나 취미를 즐기면 삶의 활력을 유지하고,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호위대 모델’이라는 것이 있다. 미시간대 심리학과의 로버트 칸과 토니 안토누치 교수가 개발한 개념으로 사회적 네트워크가 노년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1차 네트워크.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여기에 포함된다. 2차 네트워크는 학교 동창이나 동네 이웃, 지인 등으로 구성된다. 3차 네트워크는 직장 등 공적 활동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현역시절에는 3차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은퇴하면 가장 빨리 소멸하는 과정을 밟는다. 2차 네트워크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창 모임에 나가봤자 자기 형편과 맞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해 참석이 뜸해진다. 새로 2차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어렵다.
은퇴하면 가장 신경 써야 할 게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1차 네트워크다. 그중에서도 은퇴 후 함께 갈 친구는 더 깊이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활동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에 친구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노후에 친구사귀기가 쉽지 않고 있는 친구마저도 소원해지는 게 현실이다. 나이를 먹으면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해 비판적인 성향을 띠어 상처를 주기 쉽고 받기도 쉬워져서다. 젊을 때엔 쉽게 화해했을 일도 여간 해서 타협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사소한 것 가지고 언쟁을 벌이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고 드잡이까지 벌인다.
종국엔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화를 나눈다 해도 기껏해야 상대방의 뒷담화나 옛날 이야기가 주류여서 하품만 나온다. 은퇴기엔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너 나 구분없이 백수신세
은퇴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 세상 모든 월급쟁이는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직장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55세 넘으면 싫건 좋건 계급장을 떼고 퇴직행렬에 들어선다. 집을 나오면 술집, 밥집이나 산에서 친구들과 마주치는 기회가 많아진다. 그땐 너나 나 구분 없이 똑같은 백수신세다.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도 친구를 깊이 있게 사귀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쓸쓸하고 외로운 은퇴생활일수록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행복이 커진다. 서먹서먹한 친구라면 먼저 다가가 따뜻한 손을 내밀자. 그 기나긴 은퇴생활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게 보내지 않으려면 말이다.
[서명수 ESG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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