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ESG 공시 미적...선제 준비할 기업들의 대응 체력만 떨어뜨리는 꼴

세계적으로 탄소 무역 규제와 ESG 공시 강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해 아시아 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며, 유럽이 엄격한 환경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은 유럽기업도 녹록치않다. 필자가 영국의 탄소 교육 전문가와 이야기 나누며 들은 바로는 유럽 기업들 역시 EU를 포함해 이 같은 글로벌 규제 기준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제가 단지 아시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유럽 내부에서도 큰 도전이 되고 있다고 한다.
유럽연합은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하는 그린 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BAM)이 주목을 끈다. 유럽 밖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 탄소 배출량에 비례하는 비용을 부과함으로써, 유럽 내 제조업체와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려는 제도다. 이로 인해 해외 공급망을 통해 부품과 소재, 원자재 등을 수입하는 상당수 유럽 기업들도 많은 비용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자국 내에서도 상당한 재정적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 CSDDD) 일명 '공급망 실사 지침' 또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과 수출입 관계를 맺은 기업들로선 또 다른 골칫거리다. 기업이 회사 자체 운영과 가치 사슬 전반에 걸쳐 인권침해나 환경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실사를 요구하는 것으로, 거래 관계에 있는 원자재 수출 기업의 인권, 노동 등 지속가능성 부분까지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한다.
유럽 기업들, ESG 규제에 역발상으로 대처

이와 같은 탄소 ESG규제들은 이를 주도한 유럽의 기업들조차 이행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기업들은 이러한 규제에 역발상(逆發想)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 기업의 기초 체력을 키우고 각 요소별로 경쟁력 있는 토양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탄소 규제를 통해 각 분야별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공익'이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전환 부분을 보면 석탄을 덜 쓰면 공기와 수질 오염을 줄여, 지역 사회와 생태계가 개선된다. 원유 사용을 줄이면 원유 유출에 기인한 환경 오염도 줄이고 생산 과정에서의 메탄 방출도 줄일 수 있으며 개발 과정에서 생물다양성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을 줄이면 핵용융이나 핵폐기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방사선 피해를 줄이고 우라늄 광산 종사자들의 방사능 피해를 줄 일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이면 대기와 수질 오염이 줄어들고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서도 에너지 사용이 수월해지게 되며, 여기에 신재생에너지 밸류체인 상에서 각종 고용 창출까지 기대할 수 있다.
상쇄 수요 증가로 배출권 가격이 오르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기업들은 배출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대기질은 개선되며 이에 따라 공공 보건 측면에서 의료 비용이 줄어들고 배출권 판매 자금으로 신재생에너지 투자가 촉발되어 여러 공익적인 부분에서 투자도 활성화 될 수 있다.
탄소규제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공익' 많다
교통 물류의 경우도 탄소 저감을 위한 기술 개발을 통해 교통 체증도 줄일 수 있고, 전기차 사용을 통해 대기의 질이 향상되며, 신산업을 통해 고용 창출도 가능하게 된다. 자전거를 많이 타고 왠만한 거리는 걷는 습관을 들이면 건강에 도움되는 건 덤으로 얻는 유익이다.
탄소중립 건물은 당연히 전기, 열 소모를 줄이는 등 건물 유지 비용이 절감되고, 기존 화석연료 열 에너지 시설의 소음도 줄일 수 있다.
생물 다양성 측면에서도, 예컨대 도심 근교나 산단 주변에 녹지를 조성하거나 훼손된 숲을 다시 살릴 경우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휴식처로 활용할 수 있다. 최근 큰 관심을 받는 유기성 폐기물을 활용한 바이오차(char)를 비료로 활용한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공공의 유익을 차치하고라도 우리 기업들이 지난 수십년 간 너무 성장 일변도의 정책만 펼쳐온 것에 대한 반성과 이제 진정한 선진국가의 품격에 맞는 기업으로의 자리매김에도 탄소와 ESG 규제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각 나라마다 사정이 다 다르고 인프라나 기술 수준, 재정 여건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상황에서 탄소 정책을 EU등 선진국과 동일한 수준으로 강요하는 것은 너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기에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탄소 문제는 인류의 생존 문제이고, 인류 모두가 최고의 경계와 준비를 하지 않을 경우 다음 세대의 삶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 더이상 자국과 자기 기업의 어려움만 내세워 규제 회피와 시간끌기만 할 수는 없다.
정부, ESG공시 이런저런 눈치보며 시간만 허비
이미 2026년 EU를 출발로 영국, 호주, 중국, 일본,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등 주요 교역국들이 2027년까지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 적용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고 새롭게 변신하는게 더 합리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ESG공시 의무화 시행시기를 두고 계속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최근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 125곳을 대상으로 ESG 공시제도 관련 의견을 조사한 결과 ESG 공시 의무화 도입 시기로는 전체 응답 기업의 58.4%가 2028년 이후가 바람직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미 정해진 대세를 놓고 민주주의 토론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만 시간을 미룬다고 무슨 상황 해결이 되겠는가. 오히려 선제적으로 준비할 기업들의 대응 체력만 떨어뜨리는 꼴이다. 정부는 여론 눈치만 보지 말고 속히 변화의 파고에 올라타길 바란다.
[박희원 넷제로홀딩스 대표]
#박희원은 기업 및 지자체 등의 탄소중립, RE100 전략 수립을 지원하는 넷제로홀딩스그룹 대표다. 속초 등 지자체, 다수 대기업, 중소기업의 넷제로 전략을 자문하고, 현장의 ESG 실무자들을 위한 넷제로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공학박사(에너지자원공학) 학위를 땄다. '풀뿌리 ESG'를 주제로 <ESG경제>에 칼럼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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