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거버넌스의 이해] ⑩ 학습권과 교권은 대립 아닌 ‘조화’의 대상

  • 기자명 김상민 기자
  • 입력 2023.07.27 16:51
  • 수정 2023.07.28 09:55
  • 댓글 1

SNS 기사보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리 주장 보다 책임 우선 하는 ‘일심동체’ 파트너십 절실
‘학교의 존재 이유’ 먼저 보는 ‘교육 거버넌스’ 만들어야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의 교사 극단 선택과 관련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인근 추모식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의 교사 극단 선택과 관련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인근 추모식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SG경제=김상민 기자]

‘학생 학습권과 교사 교권은 대립 관계이며 이해충돌의 대상인가?’ 

서울 서이초등학교 A교사의 극단 선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에 대해 일단 ‘교권 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때 ‘학생 인권’을 강조했던 목소리는 분위기로만 보면 수세로 몰리는 것 같다.

교육을 통해 길러낸 우수한 인재는 대한민국 경제 기적의 기초였는데, 이를 가능케 한 ‘교육 거버넌스’가 마구 흔들리는 상황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과연 교육의 거버넌스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일단 전국초등교사노동조합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학부모의 악성 민원(49%)‘, '정당한 생활지도에 대한 불응·무시·반항(44.3%)’, '학부모의 폭언·폭행(40.6%)‘, '학생의 폭언·폭행(34.6%)’ 등 교권 침해의 유형도 다양하다.

“차에 폭탄을 설치해 죽이겠다”, “흉기를 들고 쫓아가겠다”, “결혼할 계획이 있나, 혹시 계획이 있다면 학기 중에는 수업 결손이 생기니까 방학 때 했으면 좋겠다”, “애는 낳아봤냐?” (학부모)

“아, 재미없어, 이거 왜 해, X같네”, “공무원이 나랏돈 받고 뭐 하는 거냐, 자격이 있냐” (학생)

교권을 침해하는 다양한 사례에 선생님들이 느꼈을 무력감과 분노에 저절로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교권 보호의 목소리’만 강조하다 보니 ‘학교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자칫 학생과 교사 간의 ‘법적 다툼’이 더욱 많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배가 산으로 가는 셈이다.

주입식 교육은 과거 시험의 유물

배움의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동서양에서 접근법이 약간 달랐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권의 유교 문화에서 대표적인 스승은 누가 뭐래도 공자(孔子)였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를 보면 공자가 제자들과 묻고 답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동양도 처음에는 문답식 교육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유교 경전이 과거시험의 교과목이 되면서 선현의 가르침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이 자리를 잡았다. 조선에서는 아예 “모든 경전 해석은 반드시 주자(朱子)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며 주자학을 ‘무오류, 무결점, 신성불가침’으로 여긴 유학자까지 생겨났다.

경전 해석이 다른 사람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기도 했다. 가르친 내용만 줄줄 외우면 되는 주입식 교육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절대적이었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오랫동안 금과옥조였다. 지금 중장년 세대는 학창시절을 대부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

서양은 대화법을 통해 교육...사제가 일심동체

서양은 약간 달랐다.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는 방식으로 가르쳤고, 지금도 대화법을 통한 교육이 교단의 전통이 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이란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제자를 길러내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러와 쇤베르크의 이야기. 19세기 말과 20세기의 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어느 날 제자인 아널드 쇤베르크가 난해한 표현주의 음악을 들고나오는 상황에 부딪혔다. 쇤베르크의 새로운 음악은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받았고 연주까지 거부당할 지경이었다.

구스타프 말러도 곡이 끝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흔들면서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젊으니까, 자네가 옳을 거야.” 실제로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다.

교육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동서양의 차이가 크다. 교육(敎育)이란 단어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줌‘이라고 풀이되는데, 여기엔 스승은 가르치는 능동적인 존재이고 학생은 가르침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담겼다. 스승과 제자가 ’일심동체’가 될 가능성이 적다.

교육이나 학습은 학생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과정

서양의 교육(educ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educare, educere(끌어낸다)’에서 유래했다. educare는 정신적 잠재력을, educere는 육체적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educare에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다’는 의미도 담겼는데, 수유할 때 아기가 스스로 젖을 빨아야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교육에 적용하면 교육을 받는 학생이 능동적으로 교육에 참여해야 진정한 교육이 된다는 뜻이 된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학생들에게 내재된 능력, 즉 잠재력을 끌어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즉 자립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키워내는 게 진정한 교육이다. 머릿속에 사실과 기술만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터득하는 게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육보다는 학습이란 말이 더 나은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알 듯이 <논어>의 시작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不亦說乎兒),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공부하는 동기를 외부에서 얻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얻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說은 여기서 말씀 설이 아니라 기쁠 열로 읽으며, 悅과 같은 의미인데 悅은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뜻한다. 외부 요인에 의한 기쁨은 락(樂)으로 표현한다.) 즉 배움(學)과 익힘(習)이 함께 실행되어야 하고, 스승은 이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게 원래의 교육이었다.

결론적으로 서양의 education과 동양의 학습(學習)은 스승과 제자의 ‘조화로운 관계(harmony)’를 기반으로 했다. <예기(禮記)>에서 유래한 교학상장(敎學相長,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이나 사제동행(師弟同行),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한다) 등의 말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법과 제도 보다 '인성 예의 도덕' 우선해야

스승과 학생 간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인성, 지켜야 할 예의와 도덕이 필요하다. 교권이나 학습권이나 모두 스승과 학생의 책임과 의무를 권리나 권한보다 우선해야 한다. 

<거버넌스의 이해 1회>에서 언급했듯이 거버넌스(governance)에는 '협력'이란 의미가 담겨 있고, 교육 거버넌스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기본 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교육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철학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현재 ‘교권 보호’의 방향은 자꾸 법과 제도의 정비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학교라는 곳에 ‘징벌을 위주로 한 법과 제도’가 강조된다면, 과연 ‘사랑과 존중’이 우선돼야 할 배움의 전당이 어떻게 변할까? 대한민국의 교육 거버넌스가 ‘도덕과 인성을 갖춘 미래 인재 육성’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법과 제도만 강조하다가 자칫 교권과 학습권, 교사와 학부모의 충돌만 늘어나 법적 다툼이 더욱 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얼마전 차를 몰다가 한 초등학교의 정문에 내걸린 글귀를 봤다.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나 먼저 이 말을 생각하면서 최근 ‘교권 보호 논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싶다.

“선생님은 부모처럼 친구는 형제처럼”

<김상민 ESG경제연구소장. '정치입맛 경제밥상' 저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ESG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3-07-27 22:33:03
Royal성균관대는 太學등의 별칭있고,왕립대학이며, 대한제국의 皇대학 전통과 자격을 가지고 있음. 해방후의 주권없는 일제잔재 중심 비신분제 국립대학과는 성격도 다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
주요기사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