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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의 이해]④ 공동체를 향한 ‘배려와 존중’, '책임'

  • 기자명 김상민 기자
  • 입력 2023.05.03 00:33
  • 수정 2023.05.0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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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경제는 독립된 인격의 자유로운 개인이 만든 사회
자유와 책임의 가치를 지닌 시민들이 좋은 거버넌스를 구축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작품 '칼레의 시민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작품 '칼레의 시민들'.

[ESG경제=김상민 기자]  

‘자기 사익만 챙기는 이기적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탐욕 사회.’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만든 세상은 약육강식의 불평등이 판치는 세상.’

자유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사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즐겨 쓴다. 좌파 혹은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독립된 인격을 중시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selfism, selfishness)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야말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독립된 사고를 하는 개인이야말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국가의 책임,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언뜻 느끼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는 말처럼,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게 되면 문제를 일으킨 개인의 책임은 숨어버린다. 그 결과 건강한 시민의식이 무너지면서 ‘무책임한 사회’가 된다.

무책임이 판치는 곳에서 자유와 책임에 기반을 둔 진정한 ‘국가 거버넌스’나 ‘기업 거버넌스’가 자리 잡을 수 없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사회주의 국가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의 명령이다. 당에 충성하라’는 외침은 곧 개인성의 말살을 의미하고, 상명하복의 수직적 지배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자유시장경제에 작동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관계, 즉 건강한 거버넌스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을까?

시장의 흥정은 ‘윈-윈의 협력 과정’

사람들이 모여 거래하는 시장은 ‘협력’이 필연적이다. 사고파는 사람 간의 흥정이 바로 ‘협력 과정’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정 물건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는 사람은 가격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고, 파는 사람은 가격보다 낮은 가치를 매긴다. 그러므로 거래를 통해 둘 다 ‘윈-윈(win-win)’을 실현한다.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에는 ‘개인의 이기심’이라는 기둥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다른 기둥도 있다.

그런데도 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바보처럼 생각했다. 그는 교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상호 이윤을 추구하는 동업자가 아니라 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은 잃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적’이라고 봤다.

엥겔스는 “한마디로 교역은 합법화된 사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을 따른 사회주의 국가는 자연스럽게 잘 기능하는 시장을 없앴다가 파멸을 맞았다. 반면에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지금도 거래와 교역을 활발히 펼치면서 번영하고 있다.

‘좋은 시장경제’란 ‘좋은 거버넌스를 갖춘 사회’ 즉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기심뿐만 아니라 배려와 존중의 마음을 지닌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를 ‘진정한 시민사회’라고 부른다.

거버넌스를 얘기할 때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란 말도 사용한다. 기업시민이란 기업에 시민이라는 인격을 부여한 개념으로, 현대사회 시민처럼 사회발전을 위해 공존·공생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주체를 뜻한다. 그렇다면 ‘시민’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칼레의 시민, 자유인으로 권리 누리며 막중한 책임도 

프랑스 조각가 로댕의 작품 중 ‘생각하는 사람’ 이상으로 유명한 작품이 ‘칼레의 시민상’이다. 프랑스의 칼레(Calais)는 영국의 도버와 34km 떨어져 있어 영국~프랑스의 최단 거리에 위치한다. 지금은 해저터널로 연결돼 런던~파리간 유로스타 열차가 다닌다.

칼레시 당국은 1884년 로댕에게 칼레의 ‘용감한 여섯 시민을 기리는 상’을 의뢰하기로 했다. 칼레의 시민을 기리는 동상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로댕은 자청하여 나섰다. 로댕은 왜 ‘칼레의 시민상’을 만들고 싶어했을까?

칼레를 처음 세운 건 로마인이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칼레를 영국 침공의 거점으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 칼레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백년전쟁 중인 1347년의 일이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에서 칼레를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포위했고, 근 1년간 저항하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의 만류로 시민 대표 6명을 대신 처형하고 나머지는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누군가 나서야 할 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죽음을 자원했고, 시장과 상인 등 모두 일곱 명이 나섰다. 죽음에서 한 명을 제외해야 할 때 생 피에르는 다음날 아침 가장 늦게 나온 사람을 빼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모였는데 생 피에르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생 피에르는 다른 사람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 에드워드 3세는 처형하려는 순간 왕비의 간청과 시민들의 용기에 감복해 그들을 살려주었다.

칼레 시민들의 헌신과 희생은 오랫동안 ‘노블리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책임과 의무)’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칼레의 시민’은 사실 ‘칼레의 부르주아(Burgher, 공민)’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한다. 부르주아(프랑스어 bourgeois)는 직역하면 ‘성 내의 사람’이란 의미다. 옛날 프랑크어 부르그(burg)는 성읍(town)을 뜻하는 데 현재 독일어의 ‘부르크(burg)’와 영어의 ‘보로(borough)’와 같은 어원이다.

근대 시민은 개인 재산권을 가진 자유인을 의미

성안에 살던 사람들은 차츰 성벽 내부에서 자치권을 누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들이 자유인으로 바뀌면서 근대적 개념의 시민(citizen)이 되었다. 도시(city)와 시민(citizen)의 어원은 로마의 시민권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이다. 로마의 시민권은 ‘어디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자유인이냐 노예냐’에 따라 갈리는 ‘권리’의 의미였다.

결국 시민이란 개인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고,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도시의 공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독일어 Stadtluft macht frei)”이다.

봉건 영주의 장원을 탈출한 농노가 도시로 도망쳐 잡히지 않고 1년하고 하루만 더 버티면 그는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다. 유럽과 미국에는 아직도 이런 관습법적인 전통이 남아 있어, 불법체류자라 해도 추방되지 않고 일정 기간 그 나라에 거주하면 정식 취업비자나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반면에 동양에서 시민은 그냥 ‘시(市)’에 사는 사람을 뜻했다. 시민은 대체로 도시에 살면서 공예나 상업에 종사했으므로,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질서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머물렀다. 우리가 서울 '시민’이라고 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 서양문화의 ‘시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양의 시민은 자유인으로 권리를 누렸지만, 그에 못지않게 막중한 책임도 떠안았다. 로마의 시민은 전쟁이 터지면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장만해 달려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권한과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중시했고,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웠다.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솔선수범했기에 하층민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그런 전통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나라를 위하는 군인 경찰 소방관 등 제복에 대해 최고의 예우로 대한다.)

사익 추구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윤리적 인격체

서양의 시민 즉 부르주아는 자유를 누리면서 점차 자신들의 경제 권력을 늘려나갔다. 시장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를 설명하는 학문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경제학이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작품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세상에 나왔다. 애덤 스미스는 여기에서 ‘이기적인 사익의 추구가 (결과적으로) 공익을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스미스의 표현은 ‘동기가 좋아야만 행동도 좋다’는 순진한 관념(사회주의자들의 대체적인 생각)을 바로 잡았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그렇지만 ‘경제적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아주 혐오스러운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비난을 받는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나 자본주의 비판자 모두 1980~90년대에 “탐욕은 좋은 것”이라고 외쳤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적 토대가 애덤 스미스였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자보다 도덕철학자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1759년 애덤 스미스가 펴낸 <도덕감정론>에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사악한) 경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를 단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만 여긴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윤리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다.

스미스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배려하고 동시에 그의 윤리적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공감하고 판단하는 감정이야말로 윤리성의 토대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의무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경계가 생긴다고 보았다.

윤리성은 우리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을 통해 인간이란 ’욕망-공감-의무‘를 모두 생각하고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국부론>만 보면 사람들이 돈만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감정론>을 보면 사람들은 사회 속의 자기 위치나 태도도 돈 이상으로 중시한다.

좋은 거버넌스는 책임과 배려의 정신 담겨

’좋은 거버넌스‘란 욕망만 추구하지도 않고, 철저한 이성과 규율만 강조하지도 않는다. 욕망만 찾아가면 타락해서 망가지고, 이성과 규율만 강조하면 사회주의 국가처럼 자유와 창의의 바탕이 되는 인간성이 사라진다.

’좋은 거버넌스‘를 갖춘 국가나 기업에서는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 욕망보다는 존중과 배려의 좋은 리더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견제와 균형에 따른 3권분립을 철저하게 추구했는데,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가장 닮고 싶어 한 인물이 로마의 정치인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키나투스(Lucius Quinctius Cincinnatus, BC 519–430)였다.

로마의 귀족계급인 킨키나투스는 농사를 짓다가 나라가 어려워지자 지휘관이 되어 16일 만에 적을 무찌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로마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을 때도 국난을 해결하고 공직을 사임한 후 농부로 돌아갔다.

그는 서양의 역사에서 공공에 대한 책임, 봉사, 애국, 겸손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힌다. 로마의 이상적인 시민(市民)이 바로 킨키나투스였던 것이다. 야구선수 추신수가 활약했던 신시내티(Cincinnati)의 이름이 킨키나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자유시장경제는 ‘치열한 경쟁 사회’이므로 존중과 배려가 없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자유시장경제 사회야말로 배려와 존중에 기반을 둔 협력 사회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쟁의 반대말이 바로 ‘부패와 독과점, 기득권’이고, 올바른 경쟁이 바로 공정인 반면 부패와 독과점, 기득권이 바로 불공정이기 때문이다.

부패와 권력독점이 판치는 국가는 어디인가? 바로 사회주의 독재국가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유와 책임에 기반을 둔 진정한 시민이 없고, 좋은 거버넌스가 만들어질 수도 없다. <ESG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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