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준비하는 ‘공급망실사법’...내년 도입
원료 생산·구매 과정부터 폐기물 관리까지 책임
좋은 거버넌스는 ‘권리와 의무의 동등성’에서 나와

[ESG경제=김상민 기자] 추억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연필. 모든 아이와 어른들에게 친숙한 연필은 매우 단순한 필기도구이다. 일반적인 연필은 나무, 나무를 칠한 도료(래커), 흑연으로 만들어진 연필심, 약간의 금속, 지우개, 그리고 인쇄된 라벨로 구성돼 있다.
이처럼 단순한 연필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경제학자가 있다. 미국의 레너드 리드는 1958년 <저는 연필입니다(I, Pencil)>란 책을 펴냈다. 그는 꼼꼼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연필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지구촌의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관여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나무의 벌목부터 운반과 가공까지, 흑연 광산에서 연필심으로 탈바꿈하기까지, 인도네시아의 유채씨 기름이 지우개가 되기까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저자는 “지구상의 그 누구도 연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확히 모른다”고 주장했다.
연필의 제작 과정이 이럴진 대 휴대폰이나 자동차의 만드는 과정은 얼마나 복잡할까? 사람들이 매일 생산하고 접하는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매우 복잡한 공급망을 갖는다. 레너드 리드의 말처럼 공급망 전체를 알기도 어려운데, 여기에 ESG(환경·사회적 책임·거버넌스)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세계 주요국에서 관련 법까지 만든다는 데 과연 어디까지 적용되고, 법을 지키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 명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유럽연합(EU)이 준비 중인 공급망실사법(Supply Chain Due Diligence Act, SCDDA). 유럽의회와 EU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내년부터 도입 예정인 이 법은 기업의 ESG 즉 기업 내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 인권 침해, 노동자 안전 등의 문제를 예방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시행된다.
EU에서 활동하거나 EU 기업과 거래하는 대기업 중견기업 협력사들은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글로벌 차원에서 경영하는 한국 기업들도 대응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유럽, 역사적으로 환경오염과 불평등 확대로 고통
그렇다면 공급망실사법이 왜 유럽에서 가장 앞서서 나오고, 거기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나가야 할까?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은 27개국이며 인구는 약 4억5,000만 명이다. 2022년 기준 GDP 규모는 16.6조 달러(영국 포함하면 19,8조달러)로 미국(25조 달러)과 중국(18조 달러) 다음을 자랑한다. 유럽연합에는 집행위원회, 유럽의회, 사법재판소, 중앙은행 등의 기구가 있다.
언어와 문화, 나라 크기가 다른 유럽연합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유럽의회의 구성을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회는 5년마다 선거가 이뤄지는데, 현 의회는 2019년 선거를 통해 구성됐다. 총 705석의 의석을 정당별로 보면 좌파와 우파가 골고루 분포돼 있다.
정당은 이념과 성향에 따라 연대를 통해 구성되는데, 진보주의와 녹색 정치를 표방하는 녹색당-유럽자유동맹(73석)와 자유사회주의 성향인 사회민주진보동맹(145석). 생태사회주의인 유럽의회좌파(39석) 등이 좌파 성향이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ESG에 열성적이다. 유럽인 자체가 환경과 사회적 책임 등의 이슈에 워낙 관심이 많으니, 좌파는 물론 우파 정치인들도 ESG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유럽인이 ESG에 관심이 높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탓에 스모그와 산성비 등 환경오염 또한 가장 먼저 겪었다.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 권리침해에 따른 사회 불안으로 체제가 전복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면서, 불평등 해소 즉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프랑스 혁명, 나치의 출현, 사회주의국가 소련의 등장 등이 정치 불안의 대표 사례이다.
유럽 기업들, 협력업체에 이미 RE100 적용 시작
이처럼 ESG에 대한 지대한 관심의 결과물이 바로 강력한 공급망실사법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공급망실사법은 한마디로 기업의 책임 범위가 지금보다 대폭 확대되는 걸 뜻한다. 기업은 전통적으로 조달과 물류 활동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판매하는 활동을 해왔다. 책임도 조달부터 판매까지가 전부였다.
공급망실사법은 기업의 책임 범위가 전방과 후방으로 시공간 차원에서 더욱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방(upstream)으로는 원료 생산과 원자재 공급 및 2차, 3차 협력업체까지 살필 의무가 생긴다. 원료나 원자재를 생산하는 개발도상국의 훼손된 자연이나 비참한 노동현장도 챙기라는 의미다. 예컨대 바닐라를 쓰는 아이스크림업체, 팜유를 쓰는 초콜렛업체는 바닐라나 팜유 재배농가가 열대 밀림을 훼손하지 않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후방(downstream)으로는 제품 사용과 폐기까지 봐야 한다, 폐기물이 많이 나오지 않도록 원재료와 제조방식에 신경을 쓰고, 폐기물도 환경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기업의 공시가 계열사를 넘어 협력사 공급망까지 확대된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예컨대 온실가스(GHG)의 경우 Scope 1은 기업의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직접배출로서 에너지 효율과 공정 개선, 친환경 연료 사용 등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
Scope 2는 전기나 난방 등의 사용에 따른 간접배출로 에너지 절약이나 친환경 에너지 사용으로 대응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기업이 여기에 대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 예컨대 볼보나 BMW 등 유럽 기업은 벌써 부품업체에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애플이나 델 등도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한 상황이다. RE100에 대비한 기술 개발이나 투자확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당장 해결하는 건 매우 어렵다는 게 국내 기업들의 당면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공급망실사법이 강조하는 Scope 3 즉 기업이나 조직이 소유하지는 않으나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접 온실가스이다. 배출량 감축 전략으로 공급망 관리, 친환경 제품 개발, 소비자 교육 등이 꼽히나 말처럼 쉽지가 않다. 특히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공급망을 어떻게 일일이 들여다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점차 구체화하는 공급망실사법을 피할 수는 없는 만큼, 원칙을 갖고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나 기업 차원에서 공급망실사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전체 공급망에 ‘권리와 의무의 등가법칙’을 적용하는 게 어떨까 싶다. 공급망 전체에 적정한 권리(이윤)를 보장하면서 충실한 실행과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급망에 들어오는 참여자는 ESG를 열심히 이행할 인센티브가 생기기 때문이다. ‘권리와 의무의 등가법칙’은 ESG를 중시하는 유럽 문화권의 오랜 원칙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비롯된 원칙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me)’는 표현은 로마가 멸망한 이후 중세 때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실제로 로마는 모든 길이 진흙길인 시대에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문화의 ‘정신의 길(Way of European Spirit)’도 모두 로마로 통한다는 것. 정치와 법, 경제, 사회, 건축,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로마의 흔적과 유산은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인은 법을 통해 오늘날 자유시장경제에서 지켜지는 두 가지 개념을 만들었는데, 바로 ‘개인 소유권(③회에서 설명)’과 ‘권리와 의무의 동등성’이다. 이러한 개념은 로마의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통해 부를 쌓았다. 로마 시민은 무기와 갑옷을 스스로 마련했다. 평민인 농민은 대체로 간단한 창을 든 ‘창병’이 되었고, 돈이 많은 시민은 묵직한 창과 커다란 방패, 검을 소지한 ‘중장보병’이 되었다. 말을 마련할 수 있는 귀족은 기병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상필벌’에 따라 전리품을 얻었다.
로마인은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명예롭게 여겼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도 영광으로 여겼으며, 지휘관이라도 결코 뒤로 물러서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았다. 권리와 의무의 동등성, 즉 지위가 높고 권력이 커질수록 책임과 의무도 커지고 무거워졌다.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전쟁에서의 공훈이 필수 전제조건이 되어야 했다.
로마인의 이런 생각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영화 <스파이더맨>을 보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대사가 나온다. 마블 코믹스의 다른 슈퍼 영웅들의 행동 좌우명이기도 한데, 비슷한 표현은 성경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가 오래됐다.
반면에 동양권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일치하지 않은 측면이 강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차별이 심했고, 지배층인 귀족 문벌은 별 의무 없이 권리만 누리는 반면 피지배층인 농민과 상인은 세금과 부역 등 과중한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의 원칙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배층은 예(禮)를 적용하고, 피지배층은 형(刑)을 적용한다는 차등의 원칙이 오랫동안 적용됐다. 우리 사회에서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관계를 흔히 갑을(甲乙)관계로 묘사하는데, 법치의 역사가 길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기업, 적절한 인센티브로 공급망 지속성 높여야
그렇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기업은 재무적 이익뿐만 아니라 환경, 인권, 반부패 등 비재무적 요소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책임을 묻고 투자자들이 외면하면서 기업 자체의 지속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공급망실사법이 제대로 적용되면 기업들은 공급망에 포함된 업체들을 모두 ‘동등한 파트너’로 여겨야 할 것이다. ‘적절한 인센티브 제공’이 ‘공급망 감시 비용’이나 ‘ESG 위반 비용’에 비해 훨씬 효율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기업문화의 도입을 뜻하며, ESG 가운데 G(거버넌스)의 비중이 매우 중요해질 것임을 시사한다. 기업의 경영 측면에서 과거처럼 ‘협력업체 쥐어짜기’나 ‘무조건적인 비용 절감’을 중시했다가는 부메랑을 맞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한 경영 문화는 기업의 경쟁력을 낮추고, 위험을 높이게 된다. 과연 우리 기업들은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동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한 ‘새로운 공급망 관리 문화’를 잘 만들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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