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총, 금융위에 ‘공시 시점 늦춰달라’ 공식 요청
수출 대기업, 국내서 1~2년 늦춰봐야 실익 없어
느슨하게라도 일단 시행하고 적응하는 게 바람직

[ESG경제=김광기 기자] 2025년으로 예고된 상장 대기업의 ‘ESG 정보 공시 의무화’를 앞두고 재계가 술렁이고 있다. 부담이 너무 크니 시간을 더 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최근 ESG 공시 의무화를 3~4년 유예해달라는 파격적 요청을 금융위원회에 전달했다.
벌써 2년 9개월 전에 발표된 정부 정책 방향이고, 그동안 차분히 준비해 오는 듯 보였던 재계가 갑자기 동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ESG공시의 사업보고서 통합 또는 연계 방식이 유력해지면서다.
그동안 재계는 ESG공시 의무화를 기존에 자율 공시하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좀 더 꼼꼼하게 만들어 한국거래소에 제출하면 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국내 ESG 공시 기준을 만들고 있는 금융위원회와 KSSB(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는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공시 기준을 모델로 삼았다. ISSB 공시 기준의 핵심은 ESG 관련 정보를 기업 재무 정보와 하나로 묶어 사업보고서에 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ESG 공시는 사업보고서와 똑같이 자본시장법 적용을 받는 법정공시가 된다.
거래소공시가 아닌 법정공시가 되면 그만큼 법적 책임과 비용이 커질 수 밖에 없다. 법정공시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기업의 일상 비즈니스에서 나오는 ESG 데이터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전사적인 ESG 데이터 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동안 적잖은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작성을 ESG 관련 부서에 전담시키거나, 외부 컨설팅업체에 보고서 제작을 의뢰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전사적인 ESG 데이터 관리체계를 갖춘 기업이 많지 않은 이유다.
정준희 대구대 교수가 ISSB 공시 기준과 한국 기업들의 기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내용을 비교 분석한 결과 ISSB 기준 충족도는 평균 40%에 불과했다. 이것도 상당 부분 외부 컨설팅에 의존한 것이니, 실제 공시 대응 능력은 더욱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ESG 법정공시가 무섭고, 일단 시간을 벌어보자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ESG 공시 늦춰봐야 실익이 없는 이유
그럼에도 ESG 공시 의무화를 늦추기 힘들고, 늦춰봐야 별 실익이 없는 이유가 여럿 있다.
첫째,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수출 대기업들은 예정 대로 2025년부터 ESG 공시를 해외 현지에서 할 수 밖에 없다. ISSB가 이번에 확정한 공시 기준을 ‘25년부터 적용하기로 했고, 유럽연합(EU)도 자체 ESG 공시 기준인 ESRS(유럽지속가능성공시기준)를 ‘25년부터 시행한다. ‘25년에 공시한다는 것은 그 데이터가 ’24회계연도에 산출되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24년부터 시행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발등의 불’인 것이다.
그래도 수출을 위해선 해야 한다. 수출 대기업이 해외에서 ESG 공시를 하면서 똑 같은 일을 국내에선 유예받아 봐야 아무 실익이 없다.
둘째, 국내 대기업들은 이미 ESG 공시 대응체계를 나름 갖춰놓았다는 점이다. 정부의 기존 계획대로 공시 의무화가 진행된다고 할 때 ‘25년 1단계로 시행에 들어가는 자산 2조원 이상 상장 대기업은 대략 190개다.
이중 올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표한 기업 비율은 81%(153개)였다. 이들은 대부분 수출 대기업으로 나름 대로 ESG 공시 대응 체계를 갖춰놓았다고 볼 수 있는 대목다. 물론 기존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ISSB나 ESRS가 요구하는 사업보고서 통합 방식에는 그 수준이 못미친다. 하지만 다른 나라 글로벌 경쟁 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셋쩨, 공시의 목적 자체에 대한 오해다. 세계 주요국의 금융당국과 거래소가 ESG 공시를 요구하는 1차 목적은 기업들이 ESG 요소들에 대해 제대로 된 문제 의식(철학)을 갖고, 이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ISSB 등 대부분의 글로벌 ESG공시 기준을 보면 가장 먼저 거버넌스(이사회와 경영진의 ESG 관리ㆍ감독 체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다음으로 이를 실행할 전략과 리스크 관리를 살핀 뒤, 마지막으로 세부 지표와 목표를 들여다보는 순서를 취한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거꾸로 탄소배출량 등 세부 지표의 절대치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글로벌 공시 기준은 눈앞의 지표 보다는 미래에 이를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 그 의사결정 체계와 전략, 리스크 관리 등을 우선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이를 감안하면 ESG 경영에 대한 의지와 전략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탄소배출량의 현재 측정치와 측정 범위, 인증 등 세부 사안은 다음 문제다.
넷째, 글로벌 ESG 공시 기준은 각국의 현실적 사정과 정책 방향의 독자적 선택을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ESG라는 것 자체가 정부 규제라기 보다는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자발적인 기업시민운동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얘기다.
따라서 ESG 공시 기준은 우리 정부가 정하기 나름이다. 예정대로 ‘25년부터 시행하더라도 한국적 현실을 감안한 다양한 예외와 부문별 유예 조치들을 얼마든지 취할 여지가 있다.
공시 방식 자체도 기업들이 법정공시를 너무 걱정한다면 3~4년 충분한 시간 동안 거래소공시를 통해 연습한 뒤 법정공시로 전환해도 된다. 다만 사업보고서 방식이 글로벌 표준이 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법정공시 전환은 피하기 힘든 수순이다.
마지막으로 가급적 빨리 시작해 빨리 적응하는 것이 기업에게도 유리하다는 점이다. 적당히 생색만 내도 문제가 없는 사안이라면 시간을 버는 게 곧 돈을 버는 길일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피해갈 수 없고, 그 기준이 갈수록 강화될 게 분명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적응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게 비용을 줄이는 첩경이다.
어영부영 밀린 숙제를 껴안고 시간을 끌어봐야 스트레스만 쌓을 뿐이다. ESG 공시가 의무화된다는 것은 ESG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일상 비즈니스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임직원이 이를 직시하고 자기의 일상 업무에 내재화하지 않으면 좋은 지표가 나오기 힘들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기업 경영의 체질을 바꿔놓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는 자세로 먼저 헤쳐나는 게 상책이다. ESG 공시를 우리 회사의 체질을 바꿔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자세가 요구된다.
현실적인 1년 유예론 대두
ESG 공시 의무화 로드맵을 내놓기로 한 금융위원회는 현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당초 9월말에는 로드맵을 발표할 것이란 시장의 기대와 예상에 부합하지 못한 이유다.
기업들의 유예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막상 ISSB등 국제 기준과 정합성을 갖춘 국내 기준을 만들자니 세부 작업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있기 때문이다. ISSB 기준 자체가 당초 작년 말 확정안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6개월 늦춰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ISSB 기준이 늦게 나오면서 KSSB 기준도 순차적으로 늦춰지는 모양새다.
이달 중에는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로드맵에선 당초 계획보다 1년 늦춘 ‘26년 공시 의무화 일정이 제시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제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서 국내외 시장에 이미 공표한 계획을 미룬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일단 예정대로 ‘25년부터 시행하되 그 세부 내용은 가급적 느슨하게 마련해 시작하면서 기업들이 무리없이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여전히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ESG경제는 ESG 공시 의무화에 대한 기업과 시장의 궁금증을 풀어줄 포럼을 11월1일 개최합니다. 내용은 아래 관련 기사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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