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어..."주인은 어디까지나 주주"
이해관계자들을 주인 처럼 존중해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꾀하는 것

2019년 8월 미국 BRT 선언을 보도한 뉴욕타임즈 기사. '주주가치가 더 이상 모든 것은 아니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사진=뉴욕타임즈 캡처
2019년 8월 미국 BRT 선언을 보도한 뉴욕타임즈 기사. '주주가치가 더 이상 모든 것은 아니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사진=뉴욕타임즈 캡처

[ESG경제=김광기 기자] 질문 두 개로 ESG를 향한 여정을 시작해 보자. ①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②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답은 ”①기업에 출자한 주주 ②이익(이윤) 극대화“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두 개를 연결하면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경제·경영학 교과서나 지식백과사전 등을 찾아봐도 대부분 그렇게 나온다. 이른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다.

그런데 최근 다른 견해가 부쩍 힘을 얻고 있다. 온전히 주주만이 기업의 주인일 수 없으며, 주주를 포함한 종업원, 소비자, 협력업체, 채권자, 지역사회 등 광범한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의 주인이라는 시각이다. 이름하여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다.

더 나아가 기업의 ESG경영과 지속가능 성장을 추구하는 ESG경제가 곧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의미한다는 사고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과연 그럴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개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유럽대륙식(영국 제외) 민주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이 바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불리어왔다.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기업의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노동이사)가 들어와 경영진과 공동으로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공동결정제도'

독일과 스웨덴 등은 회사법으로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제도화했다. 바로 경영자-노동자의 ‘공동결정(co-determination)제도’다. 독일 기업은 이사회를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로 이원화해 운영하는데, 이중 감독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이사가 차지한다. 스웨덴 기업은 단일 이사회인데, 대기업이 3명의 노동이사를, 중소기업은 2명의 노동이사를 두도록 돼 있다.

이와 같은 독특한 기업지배구조는 유럽 특유의 주식 소유구조에 뿌리를 둔다. 유럽은 기업과 은행이 주식을 상호 소유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은행이 기업 주식을 대량 소유하며, 기업은 거꾸로 은행 주식을 상당 부분 갖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비해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못해, 증시를 통해 일반인이 보유하는 주식의 양은 많지 않다.

이와 같은 은행 중심의 기업지배구조 아래선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정부는 감독과 규제 장치를 통해 은행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또한 기업이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환경과 광범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고루 헤아려 주길 바라게 마련이다. 그렇게 자리잡은 게 유럽대륙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며, 기업 공동의사결정 제도다.

기업의 이사회 의사결정 구조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면 ‘배가 거꾸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럽의 공동결정제도는 노사정 대타협의 산물이다. 기업은 벌어들인 돈을 고용 유지와 투자, 신규 일자리 창출에 집중 투입하기로 했고, 노동자는 기업의 혁신과 장기 안정적 성장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노동이사 선정에 노동조합은 직접 관여할 수 없도록 하고, 전직원의 의사를 묻는 별도 협의체를 만들어 덕망있고 전문성을 갖춘 외부 인물을 추천하도록 했다.

유럽의 기업들은 굳이 ESG경영을 선포하고, ESG위원회를 두는 등 조직개편을 단행하지 않는다. 이미 자리잡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전통을 따라 경영을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들도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 표방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갑자기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주주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기업들이 ESG경영에 나서며 ‘이해관계자 중시‘를 표방하면서다. 미국의 200대 대기업 모임으로 우리나라 전경련 격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는 2019년 8월 놀라운 선언을 발표했다.

애플의 팀 쿡,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GM의 메리 베라, 보잉의 데니스 뮬런버그 등 181명 CEO는 “기업의 목적을 변경해 ‘주주가치의 극대화’라는 단일 문구를 삭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5개 목적을 새로 제시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한다 △종업원에게 투자한다 △협력업체를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대우한다 △지역사회를 지원한다 △주주를 위해 장기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미국도 드디어 주주자본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는 결이 분명이 달랐다.

기업의 목적이 5개로 늘어났지만, 방점은 역시 ‘주주 가치의 지속가능한 창출’에 찍혀있었다. 181명 CEO의 선언문을 뜯어보면 “기업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해야 한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는 가치를 넘어 종업원과 고객·협력업체, 그리고 환경 등에 대한 ‘책무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를 넘어 광범한 이해관계자라는 명시적 또는 비유적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 이해관계자를 ‘사회와 환경 책무’의 파트너로서 존중하며 ‘신뢰와 협력’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게 전체적 맥락이다. 기업의 주인은 여전히 ‘주주’라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미국 대부분 주의 회사법도 그런 법리를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유럽식 ‘공동결정제도’ 같은 것은 미국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해관계자가 주인까지는 아니지만, 과거보다 훨씬 존중받는 경제시스템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미국도 이제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대륙처럼 법적, 제도적으로 노동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기업의 주인으로 대접받는 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면 미국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의가 조심스런 이유

이해관계자 논의는 한국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요즘 부쩍 몸이 단 게 노동이사제와 이익공유제의 도입 아닌가. 한국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노동이사제나 이익공유제 등의 법제화 명분으로 동원될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의 ESG경영과 시장의 ESG투자에 큰 관심을 표명하며 훈수를 확대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G를 통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유럽식 공동결정제도나 이익공유제를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ESG의 핵심적 지향점인 '지속가능한 가치 창출'은 사라지고, 이익을 단기간에 나눠먹는 잔치판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편가르기와 내몫챙기기가 만연하고, 신뢰와 협력의 '사회적 자본'이 일천해진 한국의 현실에선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ESG경제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비슷한 듯하지만, 같지 않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의가 조심스러운 이유다. 미국식 ESG는 여전히 주주자본주의의 연장선에서 이해관계자적 요소를 접목시킨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헤겔식 변증법으로 풀자면 주주자본주의(정)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반)가 만나 새로운 자본주의(합)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고 싶다. 주주자본주의가 종식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이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굳이 작명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새로운 ‘합’을 'ESG자본주의'라 부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은 어떤가. SK와 LG, KB와 신한금융 등 ESG경영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 기업들에 묻고 싶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위해 ESG경영을 하고 계십니까? 맞다면 어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입니까.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정답은 없다. 기업지배구조에 정답이 없듯이 말이다. 기업이 자기들이 처한 여러 상황과 내부 역량에 따라 친환경, 사회책임, 지배구조개선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이를 통해 재무적가치와 사회적가치의 통합치를 지속적으로 계속 높여나가면 된다. 그 성과에 대한 측정은 전문 평가기관들의 몫이다.

ESG경영을 실행함에 있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보다 앞세워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지구환경과 기업 자체의 지속가능성이다. 그게 정답이라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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